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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온 편지#1. 그래서 행복하냐고 물으신다면
#1. 그래서 행복하냐고 물으신다면

겨울의 한가운데입니다.
당신이 있는 그곳엔 어쩌면 눈이 내렸을까요.

육지에 눈꽃이 필 무렵, 여기 제주엔 빨간 애기동백이 화르르 불붙은 듯 피어납니다. 땅에서 조금이라도 키를 높이면 사정없이 가지를 흔들어대는 저 유명한 제주의 바람으로부터 귀한 작물을 보호하고자 방풍수(防風樹) 삼아 심었던 동백나무들. 어느새 사람 키를 훌쩍 넘을 정도로 자란 그 나무들이 반지르르 윤이 나는 잎새 사이로 꽃망울을 터뜨려 삭막한 겨울 섬에 빨갛고 고운 종소리를 퍼뜨리지요.

#1. 그래서 행복하냐고 물으신다면성산읍 신천목장. 하절기엔 소를 방목하고 동절기엔 귤껍질을 펴서 말린다. 이렇게 말린 귤껍질은 화장품이나 차(茶)의 원료로 사용된다고.
사유지이지만 해안가를 따라 올레길로 개방해, 바다를 향해 탁 트인 드넓은 목장에 귤껍질이 끝도 없이 펼쳐진 장관을 볼 수 있다.

서울을 떠나온 지 꼬박 2년. 제주에서 맞는 세 번째 겨울입니다. 살을 에는 육지의 칼바람과 달리 몸속으로 훅 달려 들어와 통째로 훑어가는 듯한 이곳의 바람에도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갑니다. 그동안 참 많은 이들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서울에선 보자, 보자 하면서도 못보던 얼굴들을 제주에 와서 보게 되는 일도 많았습니다. 워낙 갑작스런 결정이었고, 또 콩 볶아먹듯 일을 벌인 탓에 지인들은 당연하게도 제일 먼저 이렇게 묻지요.

“여기 사니까 어때? 좋아? 행복해?” 그 질문은 대략 두가지 뉘앙스로 다가옵니다.
‘제주 사니까 정말 좋지?’와 ‘답답해서 어떻게 살아?’ 둘 다 맞는 말이지요.

매일 아침 성산일출봉을 보며 출근했다가 바다 건너 우도 해변의 반짝이는 불빛을 보며 퇴근하는 날들이 물리지도 않을 만큼 좋기도 하고, 영화 한 편 보려면 시내에 있는 극장까지 왕복 두 시간을 달려야하니 답답하기도 합니다.
맑은 날이면 밤하늘에 빼곡히 박혀있는 별들이 놀라워 입을 다물 수 없을 만큼 좋기도 하고, 어둠 내린 먹자골목의 얼큰한 불빛이 그리운 날엔 가로등조차 없는 캄캄한 돌담길이 답답하기도 합니다.

#1. 그래서 행복하냐고 물으신다면빨간 동백과 노란 감귤의 조화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제주에 와서 더 행복해졌다기보다는 행복의 종류가 달라졌다는 편이 맞겠죠. 손님이 많아서 정신없다가 혹은 손님이 없어서 심심해하다가 하루를 다 보내고 해가 질 무렵, 가게 안으로 한껏 각도를 기울여 빼꼼히 발을 들이는 금빛의 햇살을 보며 우리는 매일 탄성을 지릅니다. 짙어진 바다 위로 층층이 쌓이는 핑크빛 노을을 그냥 보내기 아까워 카메라를 들고 가게 밖으로 뛰어나가기도 하지요.
사나운 바람소리, 파도소리 때문에 절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는 목청으로 주고받는 할망들의 대화가 싸움이라도 난 것처럼 떠들썩해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 까만 현무암 돌담 아래 흩뿌려진 꽃잎들이 예뻐 발걸음을 멈추기도 합니다. 허구한 날 일어나는 별것 아닌 일에 호들갑떨며 좋아라 하게 된 것이 제주에 오고 난 후의 가장 큰 변화입니다. 그런 별것 아닌 일들이 '행복하다'고 느끼게 합니다.
제주로의 이민 결정은 나름 인생의 일부분 혹은 전부를 거는 큰 결심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어쩌면 행복에 대한 강박 같은 것이 생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끊임없이 지금 제주에서의 내가 이전의 나보다 행복한가를 확인하고, 또 확인받으려하는.

‘이것 봐,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는 제주에서 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살고 있어.
이러니 나 행복한 거지?’ ‘너랑 다르게 살고 있는 내 모습 어때? 행복해보이지?’

하지만 내 행복을 의심하지도 과장하지도 않고, 그저 나의 선택에 책임을 지며 살아볼까 합니다. 여행이 끝난 후 가졌던 ‘여행자처럼 늙어가겠다’는 마음가짐, 제주에 발을 들인 후 결심했던 ‘낚싯밥에 끌려 다니지 않는 물고기가 되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고 살려고 합니다. 그러다 어느날 '여기가 뭐가 좋아?'라는 생각이 들면, 소설가 김연수의 말처럼 '겨우 이거야?' 라고 묻고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날 수도 있겠지요. 다만 그때는 허구한 날 일어나는 별것 아닌 일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무나 당연하던 일들이 얼마나 그리운 것들인지 알게 된 후일테니 더 쉽게 더 많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행복하냐고 물으신다면 지금은 행복하고 앞으로는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바람이 부네요. 난로에 장작을 더 넣어야겠어요. 좋은 이웃들 불러다가 모락모락 김나는 군고구마 까먹으며 소소한 얘기들로 겨울 저녁을 탕진해야겠습니다.
행복하세요, 당신도.

#1. 그래서 행복하냐고 물으신다면남원읍 위미리 동백숲. 수령 40년이 넘는 동백나무들이 잘 가꾸어져 있는 모습이 흡사 동화책 속 풍경 같다.
사유지이지만 일반인에게 개방하는데, 나무들의 생육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방문객이 많아 올겨울부터 2천 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송혜령 방송작가글을 쓴 송혜령은 방송작가로, 대학 졸업 후 십수 년간 TV 교양 프로그램과 토크쇼ㆍ다큐멘터리 등을 만들면서 세상 사는 법을 배웠고, 독서와 여행을 통해 세상 읽는 법을 배우고 있다.
마흔 살이 되던 해 하던 일을 작파하고 주위의 부러움과 우려와 억측 속에서 남편과 함께 1년간 세계 여행을 감행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1년 만에 제주도로 이주, 동쪽 바닷가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여행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작가 블로그http://blog.naver.com/coolcool220 (클릭하면 블로그로 이동)

댓글 보기
꼬꼬맘
2017.01.15
아름다운 제주.. 사진으로 보는것만으로도 힐링이네요
2017.01.14
부모님이 또가고싶다고했던제주도.....그립네요 아빠가
영이엄마
2017.01.11
그곳에 있으면 행복이 절로 생길것만 같아요
행복
2017.01.10
글을 읽고 있노라니 제주의 아기자기한 풍경이 머릿속에 펼쳐지네요~ 행복한 상상을 하게 하는 너무 예쁜 글입니다 앞으로가 기대되요^^
If you
2017.01.10
한편의 시군요. 정말 제주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옵니다. 참고로 저는 처가가 제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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