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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온 편지#2 바람이 불어오는 곳
#2 바람이 불어오는 곳
당신에게 2월은 성급한 봄의 시작인가요, 지루한 겨울의 끝인가요. 아이러니하게도 여기 제주에선 2월이 겨울의 절정이라고들 합니다. 제주바다의 바람을 관장하는 신-영등할망이 오실 즈음이기 때문이죠.
영등할망은 음력 2월 초하룻날 제주 서쪽의 한림으로 들어와 온 섬을 휘휘 헤집고 다니면서 땅이며 바다에 씨를 뿌려주고는 15일쯤 동쪽의 우도를 거쳐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는데, 이 시기에 바다 수온도 연중 최저로 떨어지고 엄청난 바람이 수시로 쌩쌩 불어대요. 해가 났다가 구름이 몰려오고 난데없이 우박이 쏟아졌다가 무지개가 뜨기도 하지요. 그래서 ‘맞아, 여기 섬이었지.’ 라고 새삼스레 실감하게 되는 때이기도 합니다.

바다를 마주한 창가에 책이나 한 권 펴들고 앉아 온종일 다른 그림을 그려대는 하늘과 일렁이는 수평선과 책장을 번갈아 바라보는 것만으로 모자람이 없지만, 왠지 창밖의 공기가 궁금하다면 바람을 피해 재빨리 숲속으로 숨어드는 게 좋아요.

#2 바람이 불어오는 곳새빨간 열매가 어여쁜 야생 자금우
콩짜개덩굴이 푸른 비늘처럼 몸을 뒤덮은 회갈색 거목들 사이로 들어섭니다. 사납던 바람은 숲의 맨 꼭대기 언저리에서 흩어지고, 움켜쥐고 있던 옷깃도 비로소 내려놓게 되지요. 한껏 키를 높인 나무의 잎사귀들이 서로 손바닥을 모아 만든 초록빛 지붕 아래 숨으면 영등할망 조차 나를 못 찾아낼 것 같은 안도감마저 듭니다. 그러고 보면 제주는 바람 부는 날의 숲 속 같은 땅입니다.

제주에서는 2년 넘도록 빨지 않은 에코백보다 명품로고가 찍힌 가방 들고 다니는 게 더 낯부끄러운 일입니다. 바닷바람에 제멋대로 펄럭이는 코트 자락은 거추장스럽기만 하죠. 그저 바람 잘 막아주는 패딩점퍼와 목도리 하나면 충분합니다. 울퉁불퉁 시골길에 반짝이는 뾰족구두가 무슨 소용 있을까요. 멋들어진 롱부츠보다는 흙탕물이 튀어도 부담 없는 장화가 편하죠. 5일마다 한번씩 서는 장터에서 5천원짜리 일바지를 사 놓고 득템했다고 좋아하는 이웃들도 있습니다.

#2 바람이 불어오는 곳'조천읍 선흘리 동백동산'에서 키 높은 나무 잎사귀들이 초록색 지붕을 만들고 있다.
덕분에 장롱과 신발장엔 쓸모없어진 코트와 재킷, 가죽가방과 가죽부츠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참 많기도 합니다. 나를 드러내려 사들인, 내가 아닌 것들. 그 중 어떤 것도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설명해줄 수 없는데, 나는 왜 그런 것들을 움켜쥐고 타인의 시선을 흘끔거리며 살았던 걸까요. 제주는 주변의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더 이상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고, 오롯이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해줍니다. 비로소 나를 제대로 들여다보게 해줍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제주로 이주해 옵니다. 도시에서처럼 치장하지 않으니 상대의 속마음이 더 잘 보이고, 도시에서처럼 배경을 알 수 없으니 사람됨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니 경우에 따라서는 나를 들킬까봐 조심스럽기도 하지요. 적지 않은 경험과 이런저런 상처를 품고 제각각의 처세술과 적당한 분칠을 몸에 익혔을 사람들이 새로운 삶터에서 만나 아직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딱 거기까지만 드러내면서 서로를 오독하거나 혹은 본모습을 간파당하기도 하는 제주에서의 생활은 더러 피곤하고 속 시끄럽기도 하지만, 이 나이쯤 먹어서 어디서 누굴 만나든 그만큼의 피로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요.

#2 바람이 불어오는 곳멸종위기 식물인 제주고사리삼 서식지
'그 사람의 생각은 그가 살아온 삶의 역사적 결론'이므로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그러나 그와 나와의 차이를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 학습의 교본, 변화의 시작'으로 삼아야 한다는 신영복 선생의 말씀을 새기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와중에 좋은 이웃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속을 다 보여주고도 서로 기꺼워, ‘우리가 왜 이제야 만났을까’ 싶은 연인처럼 시간을 함께 합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달려와주고 심심할 때 놀아주고 배고플 때 먹여주고 힘들 때 다독여줍니다. ‘안락한 삶’은 아닐지라도, 제주의 자연과 인연들은 우리에게 ‘충만한 삶’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줍니다. 이렇게 받고 살아도 되나 싶을 만큼.

#2 바람이 불어오는 곳바닷속 용암 빌레에 붙어 자라는 해초
숲에서 빠져나온 늦은 오후. 영등할망의 변덕 덕분에 맑게 갠 하늘의 노을빛이 예쁩니다. 일출봉이 바라보이는 해변에 물이 빠졌네요. 그 옛날 바다로 흘러들었던 용암의 흔적이 푸른 이끼 가득한 바위로 남아 반짝이고 있습니다. 모래해변과 유채꽃밭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서둘러 자리를 뜨는 관광객들은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지요.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면 더 아름다운 것들과 마주하게 될 거라고, 바람 부는 제주의 숲과 바다가 말하는 것 같습니다.
조급해하지 말아요. 이 바람이 그치고 나면 봄이 올 테니까요.


송혜령 방송작가글을 쓴 송혜령은 방송작가로, 대학 졸업 후 십수 년간 TV 교양 프로그램과 토크쇼ㆍ다큐멘터리 등을 만들면서 세상 사는 법을 배웠고, 독서와 여행을 통해 세상 읽는 법을 배우고 있다.
마흔 살이 되던 해 하던 일을 작파하고 주위의 부러움과 우려와 억측 속에서 남편과 함께 1년간 세계 여행을 감행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1년 만에 제주도로 이주, 동쪽 바닷가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여행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작가 블로그http://blog.naver.com/coolcool220 (클릭하면 블로그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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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콜짱
2017.02.20
제주를 여행으로 여러번 다녀오면서, 관광만을 위한 시간을 보냈는데..작가님의 글을 보면서 제주에서의 삶을 즐기는 평범하고 소소한 의미들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화려하지 않고 꾸미지 않은 작은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것이 진정 멋진 삶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 깨우침은 꼭 제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생각되네요.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여유를 가진다면...
또한, 제주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경 사진들을 보며 잠시 제주 여행 시의 추억으로도 빠질 수 있어 참 좋은 시간이 됐습니다. 다음 기회엔 제주의 상징, 올레길에 관한 글을 다뤄주심 고맙겠습니다.
한겨울의 따뜻한 차 한잔같은 좋은 글 마음 속에 두고두고 품고 갑니다...
배점옥
2017.02.17
제주 꿈의 섬이죠 낭만과 추억이 가득한 낭만의섬 생각만으로도 설램니다!
if you
2017.02.08
우리에게 이런 아름다운 섬이 있다는 건 정말 행운입니다. 제주의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글과 사진 너무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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