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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없이 이어지는 아흔 살 엔지니어의 꿈(주)창전사 정문규 회장
(주)창전사 정문규 회장
2017년 대한민국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견뎌야 하는 부담을 함께 짊어지고 가는 길이다. 지혜로운 멘토 혹은 고집불통 꼰대를 넘나드는 세간의 잣대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아마도 당사자가 스스로 나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로운 것일 터.
오늘 만난 (주)창전사의 정문규 회장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열정적인 경영자이자 엔지니어, IBK기업은행과 여전히 대한민국 전자제품 발전의 궤를 함께하고 있는 주인공이었다.

글로 기계를 만들고 기술을 배우다
(주)창전사는 정문규 회장이 1.4후퇴 때 홀로 남한으로 피난을 내려와 만든 회사이다. 이때가 1962년이었으니 (주)창전사는 올해로 꼭 55년을 맞는, 어마어마한 관록의 회사인 셈이다.
처음에 형광등과 안전기를 판매하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던 정문규 회장은 이내 안전기에 들어가는 에나멜동선을 직접 만들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전자제품들이 대개 수입품이거나 조악한 국산품이었던 시기였고 한창 산업화가 진행중이었던 당시, 전기 분야에 희망이 있다고 내다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대한 희망과 달리 사업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기술자도 기계도 없었고 원자재 확보도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자신 있다고 해서 고용한 가전제품 수리 기술자는 이내 못하겠다며 포기를 했고, 결국 정문규 회장은 기계 제작부터 원자재 확보까지 모든 걸 스스로 해내고자 마음을 먹었다. 소위 말하는 기계밥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이북에서 사범교육을 받았던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시험대였다.

“기계전공자가 아니었으니 뭘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몰랐습니다. 무작정 책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지요. 한국산업개발연구원의 전신인 한국과학정보문헌센터를 쉬지 않고 드나들면서 외국문헌과 특허 문서를 찾아 읽었고 명동에 있는 외국 서점에 찾아다니며 관련 기술책을 사 모으기 시작했어요.”

(주)창전사 정문규 회장정문규 회장이 그의 아들 정인호 대표와 기계를 점검하고 있다.
국내에서 책을 구하는 걸로는 모자랐다. 일본전기학회에 관련 책을 소개해달라고 요청하자 학회는 회원이었던 마세 기요시 씨를 소개해 줬고 그는 자신이 직접 쓴 책을 정문규 회장에게 보내주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정 회장은 뒷장에 나온 참고문헌을 다시 참고해 미국 출판사에까지 책을 요청했다. 책을 구하는 비용으로만 수천만 원을, 지금 가치로는 수억 원 상당을 썼던 시절이었고 말 그대로 ‘기계를 글로 배웠던’ 시절이었다.

성장하라 그리고 기다려라
정문규 회장은 엔지니어로서 기술개발에도 매진했지만 경영자로서의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시작할 당시 경영에 워낙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관련 서적을 찾아 읽고 기업대표들의 조언이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면서 세미나도 열심히 들었던 것.

“1970~80년대에는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에 기업 강의를 하러 많이 왔었습니다. 그때 공통적으로 들었던 말이 ‘3년’ 성장하고 1년을 ‘다듬어라’라는 소리였어요. 한마디로 급성장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말이었지요. 성장에는 자금도, 기술도, 관리도 필요한데 급성장만을 따라가다보면 구멍이 난다는 얘기였고 저는 그걸 지켰습니다. 욕심을 내지 않고 내실을 다지는 걸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주)창전사 정문규 회장(왼쪽부터) 정인호 대표, 정문규 회장,
IBK기업은행 김학필 동대문지점장, 정재호 전무

정 회장의 이러한 미래지향적인 경영철학은 (주)창전사에게 닥쳐왔을지도 모르는 위기를 비껴가게 했다. 한창 TV 사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 삼성전자가 중국에 진출하면서 함께 가자고 권유를 한 것이다. 당시 동업하던 동업자들은 거의 다 짐을 싸서 따라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정 회장은 이를 거절했다. 주변에서 무슨 소리냐고, 이런 기회가 어디 있냐며 닦달을 해댔지만 정 회장의 생각은 확고했다.

“일단 외국어가 안 됐어요. 외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여기서 제일 잘하는 기술자를 보내야 하는데 그럴 경우 국내에 공백이 생기잖아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의 기술력, 품질력을 갖고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부분이었죠. 삼성전자에 우리가 납품하는 부품을 사용하는 TV가 단종될 경우 우리 품질력을 갖고 중국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느냐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IBK기업은행과 함께 걷고 나누다
(주)창전사는 대한민국 전자제품의 발전과 그 궤를 함께 해온 회사였다. 산업화가 막 시작되던 시기에 형광등 안전기 개발로 출발해서 선풍기 모터, 라디오, 전자교환기, 전화기, 컬러TV, 전자레인지를 거쳐 현재 자동차 부품까지 생산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한민국 전자제품의 발전이 궁금하다면 (주)창전사의 역사를 살펴보면 될 일이니 우리나라 산업현장의 가장 생생한 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긴 영광과 고통의 세월 속에서 가장 생각나는 사람, 가장 고마운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묻자 정 회장이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세 사람의 이름을 꺼내놓는다. 일본학자 마세 기요시 씨와 한일산업의 김상호 회장, 그리고 IBK기업은행이다.
마세 기요시 씨는 (주)창전사의 기술개발에 큰 도움을 줬던 은인으로서, 김상호 회장은 경영의 기본이 되는 바른 마인드와 지침을 알려줬던 멘토로서 그리고 기업은행은 지금까지 (주)창전사를 있게 한 조력자로서이다.

“IBK기업은행과의 거래도 대략 53년쯤 됐습니다. 회사가 이전을 하든 늘 동대문지점과 거래를 해왔으니 기업은행의 역사와 함께 달려온 셈이지요. 초창기 동대문지점을 생각하면 지금도 생각나는 분이 두 분 계십니다. 약 4~50년 전에 동대문지점에 근무했던 강 차장님이었어요. 제주도 토박이 분이었는데 그분께서 아주 중요한 걸 제게 알려주셨죠. 딱 한 개의 은행을 주거래은행으로 삼으라는 조언이었는데 이율이나 대출의 유혹 때문에 여러 은행과 거래를 하다보면 정작 필요한 순간에 은행을 이용하기가 힘들 수도 있다는 거였어요. 또 한분은 김문범 지점장님이었어요. 아주 엄격하고 딱딱한 분으로 소문이 나있던 분이었는데 한번은 우리 공장에 가보자고 하시더라고요. 공장을 둘러보고 난 뒤에 대포를 한잔 하면서 중소기업 우량기업에 신청하라고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그 조언에 따라 우량기업 신청을 했는데 그게 우리 회사의 성장에 큰 보탬이 됐습니다.”

(주)창전사 정문규 회장정문규 회장이 IBK기업은행 김학필 동대문지점장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나의 열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IBK기업은행에 대한 추억담을 꺼내놓는 정 회장의 얼굴에서 담담한 미소가 스쳐지나간다. 이날 취재에 동행한 IBK기업은행 김학필 동대문지점장은 (주)창전사를 IBK기업은행의 상징과도 같은 고객으로 모시고 있음을 밝혔다. 더불어 정문규 회장에 대한 존경심 또한 감추지 않았다. 지금도 동대문지점을 찾아오면 스스로 1층 창구를 다니며 볼 일을 다 보고 비로소 2층으로 올라와 자신을 만나는 그 인품과 겸손함에 고객을 넘어 인간으로서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우리 지점 자체가 굉장히 오래 됐는데 그중에서도 정 회장님은 가장 오래된 고객님이세요. 우리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매김하신 분입니다. 새로 발령 받아 오는 젊은 직원들은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로 여기며 편안하게 대하고 저 역시 고객을 떠나 인격적으로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그런 분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끝까지 함께 가고픈 기업, 함께 하고픈 회장님이십니다.”

정문규 회장 방에는 여전히 빼곡하게 들어찬 책들과 빛바랜 연구노트들, 그리고 40년 된 반들반들한 나무책상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이면지를 반듯하게 잘라 만든 메모지와 짜리몽땅한 연필도 놓여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원래 그 자리가 제 자리인양 놓여 있으니 방문객들은 정 회장이 만들어 놓은 진중하고 소박한 삶의 족적, 끊임없는 호기심과 지적탐구심, 인내심 앞에서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꿈이 뭐냐고요? 이 나이에 꿈이랄 게 있습니까?(웃음) 그저 자식들에게 빚 없는, 안정화된 회사를 물려주는 것, 그리고 지금은 자동차 부품을 만들고 있지만 이 이후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의 답을 찾는 거죠. 하이브리드차, 수소차의 시대가 도래할 텐데 거기서 없어지는 부품은 뭐고 새로 생겨날 부품은 뭘까… 요즘 그걸 공부하고 있습니다.”

(주)창전사 정문규 회장정문규 회장의 사무실에는 수 많은 책과 노트가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은 참 많이 변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고매한 인격을 우러르던 시간들이 지금은 돈 앞에 고개를 숙이는 세상으로 변했다지만 그것은 아마도 ‘진짜 어른’ ‘진짜 연구자’를 만나지 못한 호사가들의 입담이 아닐까?

정문규 회장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은 ‘이토록 순수한 열정, 이토록 뜨거운 학구열, 그리고 나이를 초월한 더없이 아름다운 인간미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주)창전사 정문규 회장(주) 창전사 직원들이 카메라 앞에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글 이경희, 사진 정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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