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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 물감을 뿌린 사나이잭슨 폴록
잭슨 폴록잭슨 폴록, <암늑대>, 캔버스에 유채, 170.2×106.4cm, 1943, 뉴욕 현대미술관
혁신은 개선이 아니다. 개선이 기존의 것을 손질해 사용하는 것이라면 혁신은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미술사의 거장들은 혁신의 아이콘들이다.
인상파의 스캔들 메이커 에두아르 마네, 근대미술의 수원(水原)으로 통하는 폴 세잔, 입체파의 문을 연 파블로 피카소, 기성품(旣成品)을 작품화한 마르셀 뒤샹 등은 기존의 관습화된 조형 문법을 바꾸며 미술의 영토를 한껏 넓혔다.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의 주역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회화 기법이 난무하던 20세기에 그는 에너지와 감성이 넘치는 ‘액션 페인팅’으로 미술의 유구한 전통과 정의를 바꿔놓았다.

잭슨 폴록한스 나무스의 사진, <‘가을 리듬(Autumn Rhythm)’을 그리고 있는 잭슨 폴록>, 1950
‘액션 페인팅’, 물감과 함께 춤을
1912년 미국 와이오밍 주에서 태어난 폴록은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 공부하며 유명 예술가가 되겠다는 신념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도 초기에는 이젤, 팔레트, 붓과 같은 전통적인 도구로 그림을 그렸다. 초기만 해도 폴록의 작품은 ‘액션 페인팅’과는 거리가 멀었다. 캔버스에 유채물감으로 표현한 평범한 구상화였다. 그러다 파블로 피카소의 입체파와 초현실주의, 멕시코 벽화 등 다양한 회화 장르와 표현 기법을 체험하며, 추상적이고 표현적인 화풍(畵風)으로 나아갔다.

미술관에 팔린 첫 작품 <암늑대>(1943)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제목과 달리 황소(왼쪽)와 들소(오른쪽) 같은 동물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다. 이들은 하나의 붉은 화살에 꽂혀 있다. <암늑대>는 로마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동물로, 로마를 건국한 쌍둥이를 젖 먹여 키운 신성한 존재다. 무의식 속에 내재된 신화적 이미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향한 갈증은 좀체 해갈되지 않았다. 출구는 뜻밖의 작업에서 찾게 된다. 1947년부터 시작해 1950년까지 집중한 ‘드립 페인팅(Drip Painting)’, 즉 ‘물감 흘려서 그리기’였다.

잭슨 폴록잭슨 폴록, <아른아른 빛나는 물질>, 캔버스에 유채, 61.6×76.3cm, 1946, 뉴욕 현대미술관
폴록은 작업 방법부터 특이했다. 캔버스를 세워 두는 이젤을 쓰지 않았다. 대신 캔버스의 나무틀을 감싸던 화포(畵布)를 작업실 바닥에 펼쳤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이젤 페인팅’(캔버스를 받치는 대(臺) 역할을 하는 이젤을 사용해 그리는 그림을 총칭한다. 르네상스 시대 때부터 화가들의 필수품이었으나 폴록의 ‘액션 페인팅’ 이후 선택 사항이 되었다.)의 기본 도구인 이젤과 캔버스 없이 작업을 했다. 자세도 달랐다. 작가가 직립한 상태에서 정면의 캔버스를 보며 그리는 것이 이젤 페인팅의 작업 방식인데, 폴록은 상반신을 굽히고 바닥에 깔린 천을 내려다보며 그렸다. 몸의 무게중심도 자연히 어깨에서 허리로 이동했다. 따라서 재료가 굳이 물감일 필요는 없었다. ‘행위’에는 어떤 재료든 가능했다. 상업용 에나멜페인트나 알루미늄페인트, 가정용 페인트가 든 통을 들고 막대기나 작은 삽, 마른 붓 같은 도구에 물감을 묻혀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며 화포에 자유롭게 흩뿌리고 떨어뜨렸다. 마치 퍼포먼스를 하듯이 작업했기에, 비평가 헤럴드 로젠버그는 이를 ‘액션 페인팅’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이젤 페인팅처럼 캔버스 ‘밖’에서 작가가 캔버스와 마주하며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캔버스 ‘안’에 들어가서 작업하는 것이기도 했다.

“캔버스에서 벌어지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이벤트였다. 그것은 행위로서 (중략) 캔버스에 나타나는 것들은 그림이 아니라 사건이다.”
작가의 ‘행위’에 주목한 비평가 로젠버그의 말처럼 화포가 놀이 공간이 되었다.

‘액션 페인팅’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뉴욕을 중심으로 일어난 전위미술 운동으로, 흔히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라고 한다. 이는 같은 시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앵포르멜’처럼 전전(戰前)의 기하학적 추상과 대비되는 뜨거운 역동적인 추상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폴록이 강조한 것은 억압된 내면이나 무의식보다는 그리는 행위 자체였다. 그런 만큼 그의 ‘액션 페인팅’에는 식별 가능한 주제나 형상이 없다. 어떤 의도를 형상화하거나 대상을 재현하는 그림이 아니어서 대형 화포 위를 왕복하며 뿌리거나 흘린 물감의 엉킴이 낳은 무질서한 흔적만 가득했다.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회화나 시에서 무의식적으로 작품을 창작하는 기법)’과 유사하지만 ‘그린다는 의식’보다 ‘그리는 행위’에 몰입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드리핑(Dripping)을 하는 동안은 의식이나 행위의 구별은 물론 일체의 잡념이 개입할 틈이 없다. 중요한 것은 ‘작품’이 아니라 ‘행위’였다. 오직 행위 한 순간의 흔적만이 작품으로 남았다.

잭슨 폴록잭슨 폴록, <넘버 5>, 캔버스에 유채, 120×240cm, 1948
“나는 마루에서 더 편안함을 느낀다. 캔버스 주위를 맴돌면서 그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그림 속에 있을 수 있다. 그림 속에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거의 알 수 없다. 나는 순간순간마다 벌어지는 이미지의 파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엇을 했는가를 알 수 있을 때는 작업을 마치고 캔버스 밖으로 나왔을 때다.”

그가 드리핑(Dripping)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소묘에 서툴렀기 때문일 수도 있다. 폴록은 그림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데 자신이 없어 한때 회화를 포기하고 조각가가 되려고 했다. 궁하면 통하는 법이었다. 사물을 재현하는 대신 감정을 표현하는 쪽에 관심을 보였고, 마침내 드리핑으로 불후의 결실을 보았다.

이 드리핑을 점지받은 것은 폴록이 멕시코의 벽화 작가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1896~1974)의 조수로 일하면서였다. 그때 유채물감을 칠하는 전통적인 방법 대신 물감을 붓거나 떨어뜨리는 기법과 에나멜페인트, 래커, 모래 같은 재료를 사용할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고, 훗날 그것을 실천한 것이다.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잭슨 폴록잭슨 폴록, <넘버 19>, 캔버스에 유채·에나멜 물감, 57.4×78.4cm, 1948
작품이 된 뜨거운 행위의 흔적이젤 페인팅은 그림의 상하좌우가 있다. 캔버스에 사실적으로 그린 풍경화나 인물화 같은 그림이 그렇다. 하지만 ‘액션 페인팅’은 상하좌우가 무시된 전면균질회화(All-over Painting)다. 화면에서 형상을 추방한 대신 행위의 흔적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계나 중심도, 강조점도, 전통적인 의미의 치밀한 구성도 없다. 원근법 같은 미술의 관습적인 요소도 모두 팽개쳤다. 물감을 흩뿌리는 가운데 생긴 복잡한 벽지 무늬 같은 이미지가 작품의 전부다. 탈중심을 지향하는 ‘액션 페인팅’은 혁신, 그 자체였다. 이로써 유럽 중심의 차가운 기하학적 추상은 전후(戰後) 미국 중심의 뜨거운 표현적 추상으로 바뀐다.

대표작 중의 하나인 ‘하나<넘버 31, 1950>’(1950)은 가로 530cm에 세로 270cm나 되는 대작이다. 시선을 압도하는 크기를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봐야 한다. 역시나 무엇을 그렸는지는 알 수 없는, 낙서 같은 작품이다.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수많은 물감의 흔적이 리드미컬하게 유기적으로 조형되어 있다. 겹쳐진 색들의 세심한 선택이 눈에 띈다. 베이지색과 흰색, 검정색을 주종으로 하되 회색과 갈색을 도입해 다양하고 깊이 있는 세계를 연출했다. 대부분의 ‘액션 페인팅’ 작품은 이 작품처럼 크기가 너무 커서 감상자의 시야를 압도한다.

다음으로, 2006년 11월 소더비 경매에서 146억 8,000만 원에 거래된 <넘버 5>(1948)는 드림웍스의 공동 설립자인 데이비드 게펀이 멕시코의 한 금융인에게 판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로로 긴 작품으로, 붉은색과 노란색이 화면에 활력을 더한다. 그리고 2013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612억 3,000만 원에 거래된 <넘버 19>(1948)는 이를테면 ‘작은 거인’이다. 크기는 앞의 두 작품에 비해 턱없이 작지만 조형성은 뛰어나 특별히 강조한 부분 없이 물감을 흘리고 끼얹고 뿌린 흔적들이 서로 엇갈려 화면의 밀도가 깊고 탄탄하다. 이들 작품은 미리 구상하고 그린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감정을 표현한 것이기에 대부분 제목에 숫자를 붙여 구분한다.

잭슨 폴록잭슨 폴록, <하나(넘버 31, 1950)>, 애벌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유채와 에나멜, 530.8×269.5cm, 1950, 뉴욕 현대미술관
20세기 후반의 미술을 밝히다
폴록은 드립 페인팅으로 그림에 자유를 선사했다. 점, 선, 면, 색으로 조율한 논리적인 제작방식에서 탈피해 즉흥적으로 에너지와 감성이 충만한 이미지를 조성하며 이젤 페인팅에 타격을 가했다. 즉 그에 의해 회화는 붓으로 물감을 칠하거나 사물을 재현하는 것이라는 오래된 관습이 깨졌다. 물감을 뿌리는 폴록의 행위는 ‘해프닝(Happening)’의 창시자 앨런 캐프로(1927~2006)에게 영감을 주어, 행위를 화포 밖으로 확장한 해프닝을 낳았다. 이 즉흥적인 해프닝은 다시 각본을 갖고 행동하는 ‘퍼포먼스’로 새끼를 쳤다. 또 폴록은 모든 종류의 사물이 예술의 재료가 될 수 있는 길도 텄다. “추상표현주의자 중에서 오로지 폴록만이 과정을 회복시켰고, 과정이 최종적인 작품을 구성하는 부분임을 주장했다. 폴록이 과정을 회복시키면서 미술 제작의 재료와 도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로버트 모리스)” 그가 혁신적인 이유는 이처럼 20세기 후반의 미술에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1950년 여름, 폴록은 넉 점의 대작을 완성한다. <하나(넘버 31, 1950)>, <라벤더 안개>, <가을의 리듬 : 넘버 30>, <넘버 32>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후 추상에 대한 그의 의지는 급격히 약화된다. 1951년에는 돌연 “내게 엄습하는 초창기 이미지”가 담긴 구상미술로 되돌아간다. 몰락의 서막처럼, 탄탄대로를 질주하다가 갑자기 과거 스타일로 역주행한 것이다.

잭슨 폴록잭슨 폴록, <가을의 리듬 : 넘버 30>, 캔버스에 유채, 525.8×266.7cm, 1950,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추상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세계적인 비엔날레에 수차례 참여하며 미국 현대미술의 스타 작가이던 폴록은 1956년 8월 11일, 만취한 상태에서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친다. 사실 그는 지독한 알코올중독자였다. 음주와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얼룩진 그의 인생은 마치 ‘액션 페인팅’ 같았다. 만찬에서 식탁을 뒤엎기 일쑤였고, 바에서 패싸움을 벌이는 일도 대수롭지 않게 일으켰다. 그의 신체적 사망은 곧 추상표현주의의 몰락을 의미했다. 그 자리에 구체적인 형상을 앞세운 ‘팝아트(Pop Art)’가 피어났다. 폴록의 ‘액션 페인팅’은 1948년부터 1950년 사이에 제작된 작품이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다.

글 정민영(아트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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