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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온 편지#4 꽃 같은 그대에게
#4 꽃 같은 그대에게
욕심 다 버리고 제주로 왔다고 생각했는데, 꽃샘바람 지나간 이즈음이면 부질없는 욕심 하나가 스멀스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릅니다. 바로 꽃 욕심이지요. 요즘엔 제주 시골에도 아파트형 빌라 같은 공동주택들이 들어서는 추세이지만 아직은 작게라도 마당 딸린 집에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또 이주민들 대다수는 관광객을 상대로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는 터라, 이미 땅을 점령하기 시작한 잡초를 뽑아내고 꽃으로 마당을 단장하느라 집집마다 분주합니다.

지난 가을 받아두었던 꽃씨를 이웃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모르는 새 번져나간 꽃포기를 나누어 선물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마당꾸미는 일이 어디 보통 손이 많이 가는 일인가요. 식물을 키우기보다는 죽이기에 더 소질이 있고 심지어 게으르기까지 한 나는 천일홍, 낮달맞이꽃, 천리향, 제비꽃 등등 이름도 빛깔도 고운 꽃으로 한껏 치장한 남의 집 마당을 괜히 샘나서 흘끔거리다 팽 돌아서서 길을 나섭니다. 이까짓 마당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4 꽃 같은 그대에게표선면 가시리 녹산로. 4월이면 약 10Km에 걸쳐 벚꽃과 유채꽃이 동시에 만개해 장관을 연출한다.
톡, 톡, 톡톡톡… 여기저기 꽃망울 터지는 소리로 소란합니다. 1년 사시사철 꽃을 볼 수 있는 제주이지만 특히나 4월이 되면 온 섬이 꽃밭이고 발길 닿는 곳마다 꽃길이지요.
빈 땅 어디든 물색없이 올라오는 유채꽃은 제주 봄의 상징입니다. 제주 이주민들 중엔 까만 현무암 돌담 아래 화사하게 피어난 유채꽃 무더기에 마음을 빼앗겨 자신의 마당에 옮겨 심었다가 ‘잡초를 왜 심느냐’는 제주 할망들의 타박을 받은 이들도 있다더군요.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가 거친 바닷가를 연보랏빛으로 물들이는 꽃더미를 만나게 된다면 그건 갯무꽃일 거예요. 하나하나 뜯어보면 소박하기 그지없지만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무리지어 피어있는 모습은 장미꽃다발 못지않게 아름답지요.
하지만 4월 제주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크고 탐스런 왕벚꽃이 아닐까요. 4월 초,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벚꽃이 피어나면 제주는 한바탕 축제 분위기에 휩싸입니다. 길을 따라 양쪽으로 늘어선 왕벚나무 꽃터널 아래를 손잡고 걸으면 없던 사랑도 샘솟을 것 같은 기분이 되지요. 살랑살랑 일렁이는 바람에 새하얀 꽃비라도 내리면 축복받는 느낌에 저절로 행복해질 거예요.
머리 위로는 벚꽃이, 다리 아래로는 유채꽃이 한가득 피어있는 길이라면 어떨까요. 이제는 꽤 유명해져서 주말엔 길 양 옆으로 차를 대고 꽃밭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사람들 탓에 차선 하나가 사라져버리기도 하지만, 아무리 붐벼도 이맘때면 꼭 한 번은 지나고 싶은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길. 그 길 위에서 단 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엄마. 꽃 같은 그 이름, 엄마.

#4 꽃 같은 그대에게해안가에 자라는 연보라빛 갯무꽃
스무 살 여대생은 오늘따라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영 마뜩찮습니다. 이리저리 옷매무새를 다듬어도 보고 머리를 묶었다 풀었다 다시 묶었다 해보지만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얼굴엔 짜증만 더해갈 뿐이지요. 속 모르는 엄마가 여대생을 바라보며 말합니다.
"예~쁘네!"
철없는 스무 살은 기어이 애먼 엄마에게 짜증을 쏟아냅니다.
"본인 딸이니까 그렇게 보이겠지!!!"
그리곤 괜히 발을 쿵쾅거리며 집을 나섰습니다.
그날, "엄마 닮아서 예쁘지." 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남쪽에서 꽃소식이 들려오던 어느 봄날, 엄마가 친구들과 함께 관광버스를 타고 진해까지 벚꽃구경을 간다고 했습니다. 허리도 아프다면서 그 멀리까지 힘들어서 어떻게 다녀오려고…
걱정을 한다는 게 그만 못된 말로 받아치고 말았습니다.
"할머니같이 무슨 꽃구경이야?"
그날, "꽃이 무슨 꽃구경을 간다고. 엄마 미모에 꽃잎 다 지겠네." 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4 꽃 같은 그대에게벚꽃터널 아래를 지나는 연인들
지갑 속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사진 속엔 꽃 같은 시절의 엄마가 웃고 있습니다. 한때 스스로 그토록 탐스럽던 꽃은 이제 꽃잎이 시드는 것도 잊은 채 온통 열매 돌보는 일에만 마음을 빼앗긴 모양입니다. 매일 드리는 안부 전화의 대답은 맞벌이하는 작은 딸 내외를 대신해 키우는 손주 녀석이 오늘은 어떤 말과 행동으로 당신을 놀라게 했는지 자랑 아닌 자랑으로 채워지기 일쑤죠. 아픈 데는 없는지, 잠은 잘 주무셨는지 물어도 마치 되돌이표처럼 결국엔 다시 기특하게 여물어가는 아이 이야기로 돌아오고 맙니다. 아이가 여물어가는 만큼 엄마는 시들어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가요.
그 때의 엄마처럼 얼굴이 잘났든 못났든 스무 살 무렵의 아이들이 그렇게 예뻐 보이는 나이가 되었지만, 따뜻한 햇살이 간지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활짝 웃는 꽃들이 그렇게 좋아지는 나이가 되었지만, 부쩍 작아진 엄마를 두고 저 좋자고 제주에 내려와 사는 큰 딸은 여전히 철없는 스무 살 같습니다.
아무래도 엄마를 한 번 초대할 때가 된 게지요. 둘이 손잡고 나란히 제주의 꽃길을 걸어야겠습니다. 휙 한번 지나가는 바람에 꽃잎이 어여쁘게 흩날리거든 엄마가 웃으셨나보다 생각해주세요.

#4 꽃 같은 그대에게꽃 같은 시절의 부모님
송혜령 방송작가글을 쓴 송혜령은 방송작가로, 대학 졸업 후 십수 년간 TV 교양 프로그램과 토크쇼ㆍ다큐멘터리 등을 만들면서 세상 사는 법을 배웠고, 독서와 여행을 통해 세상 읽는 법을 배우고 있다.
마흔 살이 되던 해 하던 일을 작파하고 주위의 부러움과 우려와 억측 속에서 남편과 함께 1년간 세계 여행을 감행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1년 만에 제주도로 이주, 동쪽 바닷가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여행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작가 블로그http://blog.naver.com/coolcool220 (클릭하면 블로그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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