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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로 화합을 그리다디에고 리베라
디에고 리베라디에고 리베라, ‘십자로의 남자’, 프레스코, 1934(멕시코시티, 예술궁전)
멕시코의 벽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 미술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도 그의 이름은 낯설다. 한 번쯤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여전히 아리송하다. 하지만 ‘프리다 칼로(1907~1954)의 남편’이라고 하면, 비로소 알아보는 이가 적지 않다.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리베라는 칼로의 남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작품보다 몸무게 130kg에 키 180cm가 넘는 거구로 화려한 여성 편력을 지닌 스물한 살 연상의 바람둥이 남편으로 말이다. 고통스러운 삶을 그림으로 승화시킨 칼로를 다룰 때나 간간이 언급될 만큼 리베라는 우리에게 인기 있는 화가는 아니다.

디에고 리베라
그렇지만 서양미술사에서 리베라가 차지하는 위상은 뚜렷하다. 멕시코 벽화운동을 이끈 스타 작가이자 20세기 라틴아메리카 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리베라로 대표되는 벽화운동은 식민지에서 해방되고 내전으로 상처 입은 멕시코인들에게 민족적 정체성을 찾아주고 화합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0년대 우리나라 ‘민중미술’의 걸개그림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 리베라 일파의 벽화다. 그 벽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멕시코혁명과 벽화운동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멕시코혁명, 벽화운동을 낳다
1910년은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런데 같은 해에 35년간 멕시코를 통치했던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에 항거하는 멕시코혁명이 발발한다. 멕시코혁명은 일부 엘리트와 중산층, 극소수의 대지주에게 토지를 빼앗긴 농민과 산업화 초기에 억압받던 노동자가 일으킨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극심한 갈등과 분쟁 속에 디아스가 축출되고, 1917년 혁명헌법이 제정되면서 피비린내 나는 혁명이 종식된다.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킨 멕시코혁명은 정치·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정치혁명에서 농지 개혁을 요구하는 경제혁명으로, 다시 의식 개혁을 주도하는 문화혁명으로 전개되면서 사회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혁명이 끝날 무렵에 등장한 벽화운동은 문화혁명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우리가 보통 ‘멕시코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벽화운동은 1920~1930년대에 걸쳐 국가가 지원한 이데올로기 중심의 아방가르드 운동을 말한다. 특히 독자적인 혁명적 양식과 주제를 발전시킨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é Clemente Orozco, 1883~1949),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 1896~1974), 이들 ‘3대 벽화가’가 주도한 벽화운동의 목표는 스페인 식민지 이전의 과거를 토대로 멕시코의 정체성을 재창조하고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디에고 리베라디에고 리베라, ‘축제의 장: 산타 아니타 운하의 슬픈 금요일’, 프레스코, 456×356㎝, 1923~1924(멕시코시티, 교육부 청사)
“우리는 위대한 대가들과 함께 스페인 침략 이전 아메리카가 지닌 탁월한 문화의 직접적이고 생생한 사례를 바탕으로 기념비적이고 영웅적인 미술, 인간적이고 공적인 미술을 창조해야 한다.”(시케이로스, ‘아메리카 미술가들에게 보내는 선언문’에서)

신생 정부는 문화 개혁을 위해 미술가와 협업함으로써 새로운 국가적·문화적 정체성 정립을 향한 멕시코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사실 멕시코혁명과 10여 년에 걸친 내란으로 희생된 맥시코인이 100만 명 이상이었고, 정권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가운데 대다수의 국민은 심신이 피폐해 있었다. 1921년경부터 소수의 화가들이 시작한 벽화운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져갔다. 이로써 멕시코뿐만 아니라, 유럽의 모더니즘 미술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양식으로 전파되었다. 특히 미국 현대미술에 끼친 영향으로 서구 중심의 현대미술사에 제3세계 미술로는 유일하게 멕시코 벽화운동이 등장할 정도다.

디에고 리베라디에고 리베라, ‘창조’, 납화와 금박, 708×1,219㎝, 1922~1923(멕시코시티, 국립예비학교 볼리바르 극장)

벽화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알바로 오브레곤 정권(1920~1924)의 교육부 장관 호세 바스콘셀로스(1882~1959)였다. 그는 혁명 의식을 고취하고 민족주의의 틀로 문화와 역사를 재확립하고자 구체적인 실천 방안까지 구상했다. 바로 시각 이미지를 활용한 대규모의 벽화 사업이 그것이다. 화가들의 예술성을 한데 모으면 사회적 통합이 가능하리라고 믿은 것이다. 이를 위해 화가들은 멕시코를 분열시킨 식민지 시대보다 멕시코인이 공유한 과거의 유산에 눈길을 돌렸다. 과거를 영웅적으로 해석하고 시각화해 멕시코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부심을 심어주자는 전략이었다. 당시 멕시코는 문맹률이 90%에 달했다. 벽화운동은 애당초 이런 국민을 시각 이미지로 계몽하기 위해 추진된 국가적인 프로젝트였다. 새로운 민족미술과 문화적 정체성을 창조한다는 사실에 고무된 많은 화가가 여기에 참여하기 위해 멕시코로 귀국했다. 그 가운데 리베라도 있었다.

입체파 화가에서 벽화가로 거듭나다멕시코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리베라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열 살에 산카를로스 미술학교에 입학하고, 스무 살에 장학생으로 유럽 유학을 떠나 스페인에서 2년, 프랑스에서 10년을 머문 그는 피카소, 브라크 등의 입체파 화가들과 어울리며 입체파 미술에 몰두했다. 당시 멕시코 미술은 바로크적 아카데미즘이 대세였던 스페인 식민지 미술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바스콘셀로스에게 벽화 프로젝트에 동참해달라는 제의를 받은 리베라는 먼저 이탈리아로 갔다. 틴토레토, 프라 안젤리코, 조토, 우첼로, 만테냐, 미켈란젤로 같은 거장들의 벽화에 나타난 서사적 구성과 압도적인 스케일 등을 통해 대중을 교화하는 미술 형식을 고민하며 17개월 동안 벽화를 연구했다.

디에고 리베라디에고 리베라, ‘축제의 장: 산타 아니타 운하의 슬픈 금요일’, 프레스코, 456×356㎝, 1923~1924(멕시코시티, 교육부 청사)
1921년에 멕시코로 귀국한 리베라는 유럽에서 배운 입체주의 화풍을 버리고, 토우(土偶)를 수집하며 벽화에 멕시코의 토착 문화를 접목한다(그는 수집한 5만 점의 토우를 전시하기 위해 ‘아나우아칼라 박물관’을 지었다). 토우에서 창작의 동력을 찾은 리베라의 벽화는 유럽 회화에 멕시코 전통을 접목했다는 평가 속에 서서히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리베라의 첫 작품은 1922년 초에 작업한, 멕시코시티의 국립예비학교 볼리바르 원형극장에 있는 벽화 ‘창조’다. 리베라는 시케이로스, 오로스코와 함께 ‘노동자ㆍ화가ㆍ조각가조합’을 창설한다. 그리고 벽화운동의 이념적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사회적 정치적 미적 원칙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한다.

“우리는 이른바 이젤 회화를 거부한다. (중략) 이젤 회화는 다분히 귀족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기념비적 미술을 옹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공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미술은 더 이상 개인적 만족의 표현이어서는 안 된다. 모든 이를 위한 투쟁적이고 교육적인 예술을 추구해야 한다.”

벽화운동의 원칙을 구체화한 이 선언문은 벽화운동을 공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며 교훈적인 미술로 정의했다. 벽화는 개인에게 호소하는 이젤 회화와 달리 단체 관람자에게 발언하는 조형 형식이다. 즉 벽화는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소규모의 회화 형식을 거부한다.
시케이로스는 다양한 기법과 재료를 실험하며 복수의 시점과 형태 왜곡, 격정적인 색채 등으로 대담하면서도 역동적인 벽화를 그렸고, 오로스코는 짓밟힌 민중의 수난을 표현주의적인 사회적 리얼리즘의 기법으로 전달했다. 이들과 달리 리베라는 단순화된 형태와 밀도 있는 평면으로, 멕시코 토착 문화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자본주의의 파괴,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 민중의 승리 같은 생각을 구체화했다. 이들 3명의 벽화가 덕분에 벽화는 멕시코를 알리는 세계적인 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한다.

벽화를 통해 멕시코의 화합을 이끌다리베라의 가장 야심 찬 프로젝트는 멕시코시티의 국립궁전 벽에 3개의 화폭으로 구성한 ‘멕시코의 역사’(1929~1935)다. 1929년에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도 완성하지 못한 작품이지만 멕시코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신생 정부의 시각으로 묘사한 역작이다. 그러니까 ‘스페인 이전의 문명에서 정복까지’와 ‘정복에서 미래까지’, ‘계급투쟁-현재 그리고 미래’에서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이전의 멕시코를, 전설적인 신이자 왕이 몰락하는 시기부터 시작하여 카를 마르크스가 인도하는 이상적인 미래에 이르기까지 멕시코의 역사와 신화의 세계를 넘나들며 가상의 파노라마로 장쾌하게 펼쳐 보인다. 이 거대한 벽화는 멕시코 역사를 통해 신생 국가 건국의 기원에 대한 알레고리를 제공하며 멕시코 정부의 혁명적인 민족주의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디에고 리베라디에고 리베라, ‘멕시코의 역사: 정복에서 미래까지’(부분), 프레스코, 1929~1935(멕시코시티, 국립궁전)
리베라는 거구만큼이나 작품의 제작량과 크기에서도 압도적이었다. 인물과 사건이 빼곡한 구도로 전통적인 주제와 근대적인 주제를 아우르면서 큰 벽면을 캔버스 삼아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유감없이 표현했다. 벽화가 민중에게 말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회화라고 생각한 만큼 그의 벽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멕시코의 유산에 긍지를 갖도록 했고 사회주의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할 것을 주창했다.

3인의 벽화가가 국제적인 관심을 끌자 미국에서도 작업을 의뢰했다. 시케이로스와 오로스코도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했지만 가장 주목을 받은 인물은 단연코 리베라였다. 샌프란시스코 증권거래소와 캘리포니아 예술대학, 뉴욕 독립노동연구소 등에서 벽화를 완성한 그는 마침내 석유 재벌인 록펠러 가문이 소유한 뉴욕 록펠러 센터의 벽화 작업까지 의뢰받아 작업에 착수한다. 그런데 1933년 3월에 시작한 이 빌딩의 로비 벽화(‘희망과 높은 비전을 안고 더 나은 미래를 선택할 기로에 선 인간’)는 작업 도중에 뜻밖의 수난을 당한다. 혁명과 노동자를 찬양하는 내용의 벽화에 레닌의 초상을 그려 넣은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결국 벽화는 제작이 중단되고 이듬해 2월에 파괴되었다. 리베라는 이 사건으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벽화가가 되었지만 다시 멕시코로 돌아가 레닌 부분을 살린 벽화 ‘십자로의 남자’(1934)를 완성한다.

디에고 리베라디에고 리베라, ‘멕시코의 역사: 계급투쟁-현재 그리고 미래’, 프레스코, 1929~1935(멕시코시티, 국립궁전)
민족의 정체성 확립과 화합을 꾀했던 멕시코 벽화운동은 우리의 시금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최근 우리 사회는 정치적 혼란 속에 각자로 분열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화합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지금 우리에게는 리베라의 벽화처럼 갈등의 세계를 화합의 세계로 이끌 새로운 상상력이 절실하다.


글 정민영(아트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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