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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온 편지#5 초록이 사라지기 전에
#5 초록이 사라지기 전에
“이러다 몸에 아가미가 생기겠어!”
제주에서 맞았던 첫 봄을 기억해요. 바람이 부드러워지고 햇살이 따뜻해지고 봄꽃들이 만개하는가 싶더니 이틀 걸러 하루씩 비가 오기 시작했죠.
축축한 공기에 아침, 저녁으로 안개가 피어오르고 친구들은 아가미 호흡이라도 해야 할 판이라며 쨍한 햇빛을 그리워했어요.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제주에 ‘고사리 장마’라는 게 있다는 걸.

#5 초록이 사라지기 전에봄비에 젖은 들판에서 솟아난 고사리 순
해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략 벚꽃잎이 다 지고 난 즈음부터 제주엔 한동안 장마 같은 비가 내리는데, 이 비를 맞으면서 고사리가 쑥쑥 자란다고 붙은 이름이라고 해요. 제주산 고사리는 육지 것보다 살이 훨씬 통통하고 연해서 맛있다죠. 그래서 비가 그치고 나면 소위 고사리원정대가 출동합니다. 모자 쓰고 배낭 매고 장갑까지 챙겨 고사리가 많이 자랐을 법한 들판으로 나서는 거죠. 한 두 해 다니다보면 자기만 아는 ‘포인트’가 생기는데 이건 며느리한테도 안 가르쳐 준대요. 수풀이 무성한 중산간 지역에선 여기저기 눈에 띄는 고사리를 좇아가다가 길을 잃는 일도 종종 있고, 그러다 결국 실종된 할망들의 사고 소식이 뉴스에 나오기도 합니다. 중산간 도로변마다 ‘고사리 꺾다가 길을 잃지 않도록 휴대폰이나 호루라기를 꼭 지참하라’는 현수막이 나붙을 정도니, 고사리 꺾는 재미가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가나요.
봄비에 자라는 게 어디 고사리 뿐일까요. 이때부턴 잡초와의 전쟁도 시작됩니다. 뽑고 돌아서고 나면 또다시 올라오는 잡초 때문에 며칠 걸러 한 번씩 김매기를 해야 하죠. 어쩌다 시기를 놓치면 날이 더워짐과 동시에 자기 집 마당이 곶자왈(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켜서 수풀 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을 일컫는 제주방언)이 되어버리는 기막힌 상황을 맞게 되니까요. 처음 1년은 그것도 시골 사는 재미라고 에구구 소리를 내면서도 허리와 무릎이 나가는 수고를 감수하지만, 2,3년 전쟁을 치르고 나면 집 앞 빈 땅에 잔디 대신 시멘트를 깔아버린 제주 할망들의 마음이 이해가 가고도 남습니다.
바람 때문에 키를 낮춰 지은 아담한 제주 집 대부분은 마당이 시멘트로 덮여있습니다. 처음엔 볼썽사납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물질이며 밭일로 바쁜 제주 할망들에겐 시도 때도 없이 잡초가 솟아오르는 잔디밭보다 아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공구리(!)밭이 더 예뻐 보이는 게 당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루는 가게 옆마당이 보이도록 바다쪽으로 쌓여있는 돌담 일부를 허물어 창을 내고 있는데 지나던 옆집 할망이 뭐하냐고 물어보셨습니다. “마당 좀 보이라고 창문 내고 있어요. 꽃도 있고 예쁘잖아요.” 그랬더니 대뜸 이러십니다. “시멘트도 아니고 뭐이 예뻐, 참 나.”

#5 초록이 사라지기 전에마당을 시멘트로 덮은 제주 가옥
시멘트와 콘크리트는 할망 집 마당을 넘어 제주 곳곳으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불과 3~4년 전만 해도 풍력발전기가 게으르게 돌아가는 한적한 해변에 누가 올까 싶은 카페 두 개 뿐이었던 월정리 바닷가는 이제 콘크리트 건물에 겹겹이 에워싸인 형국입니다. 보다 드라마틱한 뷰(view)를 확보하기 위해 건물의 키는 높아지고 눈부신 해변엔 긴 그림자가 드리우죠. 월정리 입구의 큰 도로에서 해변 방향으로 난 골목길은 완만한 내리막 경사라 까만 밭담과 초록 푸성귀가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는 동안 에메랄드빛 바다가 한걸음씩 앞으로 다가드는 가슴 떨림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이제는 골목 양쪽으로 들어서고 있는 콘크리트 건물들 때문에 시야가 회색빛으로 가로막혀버렸습니다. 이렇게 달라진 풍경을 보고 제주 할망들은 월정리가 ‘발전’했다고 하실까요.

#5 초록이 사라지기 전에수십개의 카페 건물에 둘러싸인 월정 해변
해변 뿐 아닙니다. 초록의 숲과 들판이 펼쳐진 중산간에는 한국 자본, 중국 자본 가릴 것 없이 대규모 리조트를 지어대고 있습니다. 관광객들을 더 많이 받기 위해 공항도 새로 만들고 공항 주변은 ‘도시화’ 시킨다죠.
이제, 까치와 꿩 몇 마리가 총총거리며 뭔지 모를 먹이를 쪼아대던 숲속 빈터는 사라질 것입니다. 욕심 없이 낮은 돌담 너머 아기 주먹 같은 밀감이 나뭇가지 흐드러지게 매달려있던 귤밭을 돌아가면 이윽고 월동무의 초록잎이 아득히 펼쳐지던 올레길과, "하나만 맛볼 수 있어요?"라고 물어봤는데 서너 개를 쑤욱 뽑아 건네던 투박하지만 인심 좋은 농부의 무밭은 가뭇없이 갈아엎어질 것입니다. 쉴 새 없이 종알거리는 새들의 이야기와 나뭇잎 사이사이 골고루 매만지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는 중력을 거스른 쇳덩어리의 굉음에 덮이고 말겠죠.
5월 제주엔 청보리가 한창입니다. 배를 타는 약간의 수고를 더해 가파도에 가면 섬 전체가 초록으로 일렁이는 장관을 볼 수 있지요.
봄이면 고사리 꺾으러 누비던 언덕도, 청보리 익어가던 들판도, 언젠가는 예쁜(?) 시멘트로 덮일까요. 이 속도대로라면 그 언젠가가 그리 머지않은 듯합니다. 제주에 다녀가세요. 이 눈부신 초록이 사라지기 전에.

#5 초록이 사라지기 전에복잡한 해변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월정리 올레길 풍경
송혜령 방송작가글을 쓴 송혜령은 방송작가로, 대학 졸업 후 십수 년간 TV 교양 프로그램과 토크쇼ㆍ다큐멘터리 등을 만들면서 세상 사는 법을 배웠고, 독서와 여행을 통해 세상 읽는 법을 배우고 있다.
마흔 살이 되던 해 하던 일을 작파하고 주위의 부러움과 우려와 억측 속에서 남편과 함께 1년간 세계 여행을 감행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1년 만에 제주도로 이주, 동쪽 바닷가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여행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작가 블로그http://blog.naver.com/coolcool220 (클릭하면 블로그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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