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예술이다 HOME
검색 분류
블로그 전송 카페 전송 밴드 전송 카카오스토리 전송 페이스북전송 트위터전송
선과 색의 완벽한 협연파울 클레
파울 클레파울 클레, ‘밤의 회색으로부터 나오자마자’, 두 장의 종이에 수채·펜·잉크·연필, 22.5×15.8㎝, 1918
그는 재능 3관왕으로, 어린 시절부터 음악ㆍ문학ㆍ회화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태생부터 남달랐는데, 아버지는 대학에서 성악과 음악을 가르치고, 어머니는 음악 교사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초등학생 시절 배운 바이올린 실력으로 고작 열한 살 때 베른 시 관현악단의 특별 연주자로 활동했다. 그림 실력도 숨길 수 없었다. 외할머니에게 배운 드로잉과 채색법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은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는 틈틈이 작문을 하거나 시도 썼다. 회화 작품의 제목을 지을 때도 시적 감각을 발휘해, 그의 그림은 많은 문학가의 영감을 자극하곤 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고민에 빠진다. 화가가 될 것인지, 음악가가 될 것인지 갈림길에 선 것이다. 그는 고민 끝에 화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이유는 뜻밖이었다. 음악보다 뒤떨어진 미술의 예술적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파울 클레파울 클레, ‘달걀과 맛있는 불고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종이에 수채, 15.6×28.9㎝, 1921
그는 바로 스위스의 수도 베른 출생으로 독일 현대 추상화의 시조로 통하는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다(국적은 그의 아버지를 따라 독일이었다). 어린아이의 낙서 같은 작품 스타일로, 추상화의 창시자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와 더불어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꼽힌다. 비록 회화를 위해 음악가와 문학가의 길을 포기했지만 음악과 문학은 그에게 그림을 그리기 위한 중요한 자산이 된다.

음악가의 꿈을 접고 뛰어든 미술 살리기클레는 회화 작업에만 몰두하지 않고 음악에도 꾸준히 관심을 기울였다. 오페라와 콘서트를 감상하고 비평문을 발표하는가 하면, 베른 시 교향악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며 제5회 스위스 음악 페스티벌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은 회화 작업에 방해가 되기는커녕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다. 칸딘스키처럼 음악의 화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공감각적 회화를 시도한 것이다. ‘늘임표가 있는 드로잉’(1918), ‘바흐의 스타일로’(1919), ‘붉은 초록과 황보라색의 리듬’(1920), ‘추상 트리오’(1923), ‘오래된 소리’(1925), ‘더욱 정밀하고 자유로워진 리듬’(1930), ‘다성 음악 다섯 파트’(1932) 등 음악적 열정은 종종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평생 제작한 1만여 점의 작품 가운데 500점 이상이 음악과 관련한 것이었다.

파울 클레파울 클레, ‘세네치오’, 캔버스에 유채, 40.5×38㎝, 1922
클레는 뛰어난 드로잉 화가였다. 전체 작품 중 무려 4,500여 점이 소묘 작품일 만큼 드로잉은 작업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색채에는 약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몇 달 전, 친구들과 함께 떠난 튀니지 여행을 계기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자연의 풍요로운 원색을 접한 뒤 강한 인상을 받은 클레는 색을 표현하는 데 자신감을 얻는다. 그것은 자연을 재현하는 수단으로서의 색채가 아니라 순수한 색채에 대한 자각이었다. 클레가 칸딘스키에게 이론적인 영향을 받았다면, 색채에 대한 영감은 로베르 들로네(1871~1957)에게 받았다(폴 세잔의 영향도 있다). 입체주의에 근거한 들로네의 색채 배열 작품을 보고 감동한 클레는 색과 면의 대비로 구현한 형태 사이의 미묘한 색조 변화를 천착한다. ‘함마메트 모티브’(1914), ‘마을 앞에서’(1915), ‘심원한 파토스’(1915) 등의 수채화에서 색, 면과 형태의 연결을 시도하는 가운데 색채를 보는 눈이 깊어진다. 칸딘스키가 자신의 저서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추구하던 색채에 대한 심리적 효과와 마찬가지로 클레도 정신적·심리적 색채를 중시한다.

클레는 기본적으로 구상(具象)을 벗어나지 않았다. 때로는 대상의 추상화(抽象化)를 극한까지 밀어붙이긴 했지만 칸딘스키, 몬드리안과 달리 정신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해 완전 추상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물론 추상화(抽象畵) 작품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는 거의 모든 작품에 실재 대상을 어느 정도 남겨두었다. 완전 추상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학적인 제목 짓기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감각적인 작품 제목들은 이미지에 대한 이해와 상상력을 자극했다. ‘나의 부드러운 노래에 맞춰 너 괴물 춤을 추어라’(1922), ‘늙은 비너스’(1922), ‘정도를 벗어난 기사의 마지막 모험’(1922), ‘의자 동물’(1922), ‘지저귀는 기계’(1922), ‘밤이 오기 한 시간 전’(1940) 등의 문학적인 그림 제목은 클레의 관심이 완전한 추상보다는 구상화의 극단, 즉 추상화 직전에서 멈춰 있음을 증명한다.

파울 클레파울 클레, ‘지저귀는 기계’, 카드 보드에 종이·수채·잉크·유채, 63.8×48.1㎝, 1922
문학은 클레의 삶은 물론 작품을 풍요롭게 했다. 시어들을 회화적인 요소로 삼아 작은 정사각형 색, 면에 배치한 ‘밤의 회색으로부터 나오자마자’(1918)가 대표적이다. 언뜻 보기에는 색채 구성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속에 독일어로 된 시가 적혀 있다. “밤의 회색으로부터 나오자마자 / 타오르는 불처럼 강렬하며 / 무겁고 귀한 존재가 되어 / 신의 기운으로 충만한 저녁에 기운다. / 이제는 푸른 하늘빛에 에워싸여 / 만년설 위를 떠돈다. / 별을 찾기 위하여”가 그 내용이다. 자작시로 알려진 이 시의 연 구분은 재미있게도 그림 중간에 은종이를 배치해 해결하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의의가 적지 않다. 미술사에서 한동안 그림 밖으로 밀려났던 문자를 다시 그림 속에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최소한의 요소로 최대한의 표현클레의 그림은 대부분 크기가 작다. 대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은 극히 드물다. 언제든 가지고 다니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A4 용지 크기다. 그런 그의 그림에는 위트가 넘친다.

동물을 익살스럽게 묘사한 그림을 보자. ‘달걀과 맛있는 불고기는 어디에서 오는가’(1921)는 어린아이가 괴발개발 그린 것처럼 재미있는 작품으로, 평범한 일상을 작품화한 기발함이 돋보인다. 그는 친절하게도 화폭 왼쪽에 있는 삶은 달걀에는 ‘달걀’이라 적고, 오른쪽의 돼지 밑에는 ‘맛있는 불고기’라고 적었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이 모든 그림을 그린 사람은 클레 아저씨입니다.” 이 작품은 화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친구의 딸에게 주었다.
클레는 ‘애묘인(愛猫人)’이기도 했다. 직접 고양이를 기른 만큼 ‘수고양이의 영역’(1919), ‘꽃과 소녀’(1940) 등 고양이를 소재로 한 그림이 제법 된다. 그중 ‘신성한 고양이의 산’(1923)은 입체주의 버전으로 그린 고양이 초상이다. 고양이를 중심으로 집과 달, 소녀를 배치했다. 가장 인상적인 고양이 그림은 ‘고양이와 새’(1928)다. 고양이의 얼굴을 화면 가득 클로즈업해 그린 뒤 두 눈 사이에 새를 그려 넣었다. 타원형의 눈과 눈동자, 새의 몸, 삼각형의 두 귀와 코 등 간결한 선과 형태로 고양이의 특징을 제대로 포착하고 있다. 갈색과 분홍색, 청록색의 제한된 색채와 어린아이 그림 같은 드로잉은 그림의 분위기를 밝게 만든다. 클레는 어린아이들이 창조력의 원천에 가장 가깝다고 보았고, 그런 만큼 아이들의 그림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또 어린이 그림에 숨어 있는 창조의 비밀을 지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이 그림의 천진한 표현은 그 때문이다. 코끝의 붉은 하트 모양은 고양이의 욕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울 클레파울 클레, ‘신성한 고양이의 산’, 종이에 연필과 유채, 48.5×31.8㎝, 1923
‘물고기 주변’(1926)은 구성이 아이들 그림 같지만 깃든 사연이 애틋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장에서 전사한 친구 아우구스트 마케와 프란츠 마르크를 위해 그린 작품이다. 물고기가 놓인 쟁반 위의 수초가 마케를 상징한다면, 쟁반 밖의 십자가는 마르크를 상징한다. 중앙의 물고기는 클레 자신이다. 클레는 이렇게 우정에 영생을 부여했다. 검은색 배경이 그림 전체에 죽음의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그는 다수의 자화상을 남기기도 했다. 그중에는 자화상 같지 않은 자화상이 있다. 커다란 둥근 얼굴에 좌우가 어긋난 익살스러운 눈, 작은 입이 어우러진 ‘세네치오’(1922)가 그것이다. ‘세네치오’는 노란색 꽃에 부드러운 털이 있어, 일명 ‘노인네 수염’으로 불린다. 당시 클레는 턱수염을 길렀는데, 그래서 자신의 턱수염과 세네치오를 연결해 은유적 제목을 붙였다. 큰 원으로 그린 얼굴 속에 작은 사각형과 삼각형, 타원 등을 조화롭게 배치해 익살스러운 광대의 모습을 연출했다. 대담한 붉은색과 오렌지색의 대비가 강렬하다.

파울 클레파울 클레, ‘고기 주변’, 캔버스에 유채·템페라, 46.5×64㎝, 1926
바우하우스 교수 시절(1921~1931) 클레의 작품에는 구성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기하학적 유화를 그리거나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의 색, 면을 사용한 구성 등을 다양하게 실험한다. 하지만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은 지 3년 후인 1937년에 클레는 102점의 작품을 몰수당하는 불운을 겪는다. 당시 많은 예술가가 그랬듯이 그 역시 ‘퇴폐예술가’로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뮌헨에서 열린 ‘퇴페미술전’에 17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그럼에도 이 무렵부터 단순화된 색과 굵은 선으로 그린 일종의 기호 작품이 현저하게 늘어난다. 굵고 강한 선이 특징인 이 시기의 작품은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하는 것이다”라고 한 자신의 신념을 구체화한 것이기도 했다. 클레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가 천사인데, 이때 천사가 등장하는 50여 점의 작품을 그렸다. 죽음을 앞둔 2년 동안 그린 천사는 신과 인간의 중개자로 등장하는 일반적인 천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천사’(1938)에서처럼 천사를 뚜렷한 이미지 없이 가는 선으로 단순하게 묘사하는가 하면, ‘천사 응모자’(1939)나 ‘가엾은 천사’(1939)처럼 매우 그로테스크하거나 코믹한 스타일로 시니컬한 면모도 보여준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단지 어떤 가능성이며 하나의 제안이고 임시방편적일 뿐이며, 참진실은 표면적 세계의 내부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것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파울 클레파울 클레, ‘고양이와 새’, 캔버스에 유채와 잉크, 38.1×53.2㎝, 1928
그림으로 연주한 음악과 그림으로 쓴 시클레는 성격이 조용했다. 평생 스캔들 하나 없이, 여가 시간에는 시를 쓰거나 때로는 연주를 하고 음악을 감상하며 오직 그림 그리는 일에만 전념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1916~1918), 바우하우스 교수 시절, 퇴폐예술가라는 낙인, 악성 피부경화증 등 그는 역사의 요구에 참여하거나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으면서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지상에 머문 예순한 해 동안 화가로서 자신의 결심을 부단히 실천하며 살았다. 미술의 예술적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음악가의 길을 포기한 결심이 결코 한때의 치기가 아니었음을 보란 듯이 증명한 것이다. 이는 미술계로서는 축복이었다. 다방면의 재능을 회화 작업으로 응집시킨, 누구도 가보지 않은 회화 세계를 선사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한때 칸딘스키와의 인연으로 ‘청기사파(靑騎士派)’(1911~1914)에 가입했으나 실은 현대미술의 어떤 유파와도 무관한 가장 개인주의적인 화가였다. 구체적인 상황이나 대상에서 출발한 작품의 심연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화가이기 이전에 자기 생을 사랑한 한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클레의 회화는 그림으로 연주한 음악이었고, 그림으로 쓴 시였다. 그는 세상에 없던, 세상이 기다리던 조형 언어를 선사한 뒤 미술사의 창공에 빛나는 별이 되었다.

*이 글은 일부 내용과 작품 제목 표기에서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김광우 지음, 2007)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파울 클레파울 클레, ‘대천사’, 황마에 유채, 100×65㎝, 1938
글 정민영(아트북스 대표)

댓글 보기



삭제하기
TOP
페이스북 블로그 유투브 인스타그램
검색하기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