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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온 편지#6 바다에도 꽃이 피었습니다
#6 바다에도 꽃이 피었습니다
연애할 때도 사계절을 다 겪어봐야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 수 있다고 하나요.
사는 곳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제주에 와서 첫 1년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마치 새 신을 갈아 신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요. 계절을 두어 바퀴 돌아온 지금에서야 발이 편해지고 비로소 제주가 잘 보입니다. 철 따라 바람은 어떻게 바뀌는지, 어떤 꽃이 피는지, 어떤 작물들을 수확하는지 알게 되었고 또 그중 한 때를 기다리게도 되었죠.

부쩍 고도가 높아진 태양이 따갑게 내리쬐기 시작할 즈음부터 여기 친구들은 서로서로 이런 질문들을 해요.
“수국 언제 피지? 필 때 되지 않았나?”
모두가 기다리는 그 때가 드디어 왔네요. 6월 제주는 신부의 부케처럼, 뭉게뭉게 구름처럼, 탐스럽게 피어난 수국에 둘러싸입니다. 토양의 성분에 따라 사랑스런 파스텔 톤으로 혹은 진한 보라나 자줏빛으로 색을 바꾸는 이 신기한 꽃은 바라보는 순간 입가에 함박웃음을 짓게 만드는 재주가 있지요.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따라 줄지어 늘어선 수국이 꽃을 피우는 종달리 수국길은 6월 제주에서 아마도 가장 많은 차가 브레이크를 밟는 길일 거에요.

#6 바다에도 꽃이 피었습니다해안도로 양쪽으로 수국이 한가득 피어난 수국길
푸른 바다로 눈길을 돌리면 해녀들의 주홍색 테왁(부표)이 꽃잎처럼 떠다닙니다. 제주 해녀들은 내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이유로 이맘때를 기다리지요. 우뭇가사리나 감태같은 값비싼 해조류를 채취하는 시기이거든요. 가게 2층에 사시는 해녀할머니의 얼굴이 1년 중 가장 환해지는 때이기도 해요. 모든 해녀들이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마을 공동작업인 탓에 건강이 안 좋아서, 나이가 많아서 평소엔 물질을 거의 하지 않던 동네 할망들도 5~6월만 되면 창고에 박혀 있던 테왁을 손질해 바다로 나갑니다.

수십 명의 해녀들이 한꺼번에 물에 들어가 거꾸로 발차기하며 잠수하는 모습은 그저 장관이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한, 특별한 감흥을 줍니다. 아마도 숨비소리 때문일까요. 물속에서 작업하던 해녀가 더 이상 숨을 참을 수 없을 때 밖으로 올라와 내쉬는 숨소리. ‘호이~ 호이~’ 휘파람처럼 내뿜는 숨비소리는 때로 ‘저승에서 벌어 이승 자식 먹여 살린다’는 해녀들의 한숨소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수십 번의 숨비소리 후에야 비로소 망사리(채취물을 넣는 망) 가득 우뭇가사리가 채워지지요. 물질이 끝난 후에는 옷을 갈아입기가 무섭게 젖은 우뭇가사리 말리는 작업을 합니다. 집 마당과 대문 앞 올레길, 자전거 도로나 안전지대까지 빈 땅 어디든 우뭇가사리를 펼쳐놓는 바람에 쿰쿰한 냄새가 온 바닷가에 둥둥 떠다니지요. 그렇게 날마다 할머니의 창고엔 잘 마른 우뭇가사리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두어 달 작업이 모두 끝난 후 어촌계 트럭에 물건을 실어 보내고 나면 할머니는 두둑한 봉투를 손에 쥐고 돼지고기라도 한 근 끊으러 읍내에 다녀오실 것입니다.

#6 바다에도 꽃이 피었습니다바다 위에 해녀들의 주홍색 테왁이 꽃잎처럼 떠있다.
밭작물처럼 바다 작물에도 당연히 기르고 거두는 때가 있어 철따라 해녀들의 물질 대상도 달라집니다. 할머니가 물질해 오신 것들 중 상품이 되지 못하는 작은 놈들이나 많이 건져 올린 것들은 우리 차지가 되기도 하지요. 겨울엔 소라, 봄엔 미역, 종종 손가락만한 귀한 홍해삼을 던져주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막상 먹을 땐 그것들을 바다가 준 것이라고 여길 뿐, 할머니의 수고를 떠올리지는 못해요. 모자란 사람이란 늘 그렇죠.

작년인가요. 우뭇가사리 작업이 끝나고 성게잡이가 한창이던 어느 날, 가게 문을 닫으려는데 할머니가 지친 몸을 끌고 와 가게 앞 의자에 털썩 앉으셨습니다.
"아휴, 고단해."
오전, 오후 두 번 물질을 나갔다 오셨다는 할머니의 입술 여기저기가 터져있습니다.
"먹을래?"
할머니가 들어 올린 비닐봉지 안에는 삶은 감자 몇 알이 들어있었습니다. 해녀들은 물질 나가기 전엔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깊은 바다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가려면 속이 비어 있어야 한다죠. 그러니 그 감자 몇 알이 오전, 오후 두 번 물질을 한 할머니의 첫 끼니였을 것입니다.
건장한 체구,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우렁찬 목소리, 호탕한 웃음소리까지 여느 사내 못지않게 단단해 보이는 할머니는 그러나 가끔 바다 쪽으로 아득한 눈길을 던지며 말씀하십니다.
"사는 게… 힘들어."
그러고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긴 숨비소리를 토해내시지요. 그 소리에 담긴 할머니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어떻게 말로 다 할까요.

#6 바다에도 꽃이 피었습니다테왁에 의지해 자기 물질 구역으로 이동하는 해녀
"지치고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거꾸로 들어 털어보면, 철학자 한두 명 가지고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무게의 고통이 쏟아질 것 같았다. 니체 말대로, 세계사 한 편씩 기록될 것 같았다.
그러나 우는 여인네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대신 웃었다. 깔깔깔. 대화의 반 이상이 웃음으로 채워졌다. 웃음이 없었다면 여인네들은 말라 죽어버렸을 것이다."
- <한창훈의 향연> 중에서

어느 하나 입 속으로 그냥 들어가는 게 없다는 걸, 삶은 그런 거란 걸, 제주에 와 머리가 아닌 몸을 놀려 일을 하고, 평생 몸뚱이 하나 의지해 살아내고 있는 섬사람들에게서 새삼 배우고 확인합니다. 탐스럽게 핀 수국보다 할머니의 주홍색 테왁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건 아마도 그 때문이겠지요.

#6 바다에도 꽃이 피었습니다물질을 끝낸 해녀들의 망사리 가득 해초류가 담겨 있다.

송혜령 방송작가글을 쓴 송혜령은 방송작가로, 대학 졸업 후 십수 년간 TV 교양 프로그램과 토크쇼ㆍ다큐멘터리 등을 만들면서 세상 사는 법을 배웠고, 독서와 여행을 통해 세상 읽는 법을 배우고 있다.
마흔 살이 되던 해 하던 일을 작파하고 주위의 부러움과 우려와 억측 속에서 남편과 함께 1년간 세계 여행을 감행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1년 만에 제주도로 이주, 동쪽 바닷가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여행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작가 블로그http://blog.naver.com/coolcool220 (클릭하면 블로그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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