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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를 창조한 20세기 미술의 스티브 잡스바실리 칸딘스키
바실리 칸딘스키바실리 칸딘스키, ‘무제(최초의 추상 수채화)’, 종이에 연필·수채·잉크, 49.6×64.8cm, 1910
음악적 회화를 연주한 추상화의 창시자,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법률과 정치, 경제를 공부한 그가 미술에 탐닉하게 된 계기는 1889년 예르미타시 미술관에서 본 렘브란트의 그림에 감동을 받은 다음부터였다. 1896년에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도르파트 대학교(현재 에스토니아의 타르투 대학교)의 법학 교수직을 제의받았으나 법학자로서의 학문적 출세 대신 예술가로서의 창조적 삶을 선택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경험이 영향을 끼쳤다. 한 가지는 1895년 29세 때 모스크바에서 열린 인상파 전시에서 클로드 모네(1840~1926)의 ‘노적가리’를 보고 받은 충격이었다. 처음에는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인상을 포착한 이 그림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이 당황스러운 체험을 통해, 미술의 추상성에 눈뜨며 느낌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작품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바실리 칸딘스키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5’, 캔버스에 유채, 140×201cm, 1923
또 하나의 충격은 모스크바 왕립극장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관람하고 받은 강렬한 느낌이었다. 칸딘스키는 이 오페라를 듣는 동안 광폭한 회화적 선들을 떠올렸고, 바이올린과 콘트라베이스 등 음색을 다양한 색채와 연결시켰다. 새로운 음의 관현악에서 그는 색과 선의 공감각을 체험한다. 법학 교수직 제의를 거절한 칸딘스키는 30세의 나이에 모스크바를 떠나 독일 뮌헨에서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한 동화풍의 풍경화를 그렸으나 유겐트슈틸(Jugendstil, 독일 아르누보 양식)의 장식성과 상징주의, 인상주의와 야수주의의 영향을 흡수하면서 논리적인 사색과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추상화를 향해 나아간다.

‘옆으로 누운 그림’에서 발원한 추상화어느 날 황혼 무렵, 작업실로 돌아온 칸딘스키는 깜짝 놀란다. 불타는 듯 신비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그림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 보고는 곧 실망한다. 말을 그린 그림이 우연히 옆으로 넘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를 알고부터는 감동이 사라졌다. 그림을 아무리 옆으로 눕혀놓아도 처음 보았던 아름다운 빛은 두 번 다시 보이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구체적인 대상은 그림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칸딘스키는 44세 때 한 이 경험을 통해 그림에서 객관성이라든지 대상의 구체적인 묘사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심지어 몰입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에게 그림 속 구체적 대상은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바실리 칸딘스키바실리 칸딘스키, ‘교회가 있는 무르나우 1’, 마분지에 유채, 64.7×50.2cm, 1910
그렇다고 ‘옆으로 누운 그림’의 체험이 곧장 추상화의 탄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회화적 추상이라는 신대륙을 찾기 위한 고뇌의 여정은 길었다. 만약 대상이 필요 없다면, 대신에 무엇을 화폭에 옮겨 놓아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그냥 추상적인 형태를 그리면 될 것 같은데, 당시 그로서는 그리할 수 없었다. 그 역시 대상을 묘사하는, 오랜 회화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화폭에서 대상을 제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형태와 색채의 무의미한 자율성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자연과의 유대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오직 순수한 색채와 추상적 형태의 조합에만 몰두한다면, 넥타이 혹은 카펫에나 적합할 장식에 지나지 않는 작품이 탄생할 것이다. 형태와 색채의 아름다움만이 충분한 목표는 아니다.” 추상적인 형태를 그리더라도 설득력 있는 근거가 있어야 했다. 이때 접한 빌헬름 보링거의 논문 ‘추상과 감정이입’(1907)은 예술에 재현적 모티브가 필요 없다는 확신에 힘을 실어주었다. 칸딘스키는 간절했다. 언제 어디서든 새로운 예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증거를 찾고 수집했다.

바실리 칸딘스키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8’, 캔버스에 유채, 140×120cm, 1923
‘내적 필연성’과 세계 최초의 추상화
1904년부터 5년간 유럽을 여행하며 사색한 칸딘스키는 이후 ‘내적 필연성’을 주창한다. 그는 추상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1911)에서 ‘내적 필연성의 원칙’에 관해 자세히 밝힌다.
어떤 형태나 색은 외부 세계의 대상과 무관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작가의 내면세계를 반영한다. 따라서 작가의 내면적 필연과 깊이 결부된 형태와 색은 내적 필연성이 있으므로 괜찮지만, 작가의 내면과 결부되지 않은 형태는 내적 필연성이 없으므로 작품에 해가 된다. 한마디로 화가가 느낀 감동이 감각적으로 표현되어야 그것을 보는 관람자도 감동한다는 뜻이다.
여기서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객관적인 대상을 화폭에 어떻게 재현하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대상에서 느낀 내적 감동을 보는 사람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는지였다. 그는 전통적인 기법을 가로질러 점·선·면·형·색 등의 조형 요소를 효과적으로 어우러지게 한다. 그림에서 구체적인 대상을 제거하면 선과 색의 조화만 남는데, 그것만으로도 색다른 감흥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바실리 칸딘스키바실리 칸딘스키, ‘완만한 상승’, 캔버스에 유채, 89.4×80.7cm, 1934
서양미술사 최초의 추상화로 기록된 ‘무제(최초의 추상 수채화)’(1910)는 자유분방한 색채와 경쾌한 형태가 약동하는 효과를 내는 작품이다. 여기에 대상을 유추할 만한 요소는 일절 없다. 이로써 회화를 자연물의 재현으로 본 서양 회화의 오랜 전통이 무너진다. 인간의 눈과 이성으로 대상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만큼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이 요구되었다. 그것은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는 비재현적인, 추상만으로 가능하다는 새로운 회화적 제안이었다.
칸딘스키는 회화적 형태란 내면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외부 세계보다는 내면세계에 귀를 기울여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회화적 소통이 가능한 내적인 생명을 표현하려고 했다. 사실 완전한 추상화는 그려진 이미지가 구체적 대상이 명확하지 않아서 당시 화가들로서는 시도하기 어려웠다. 칸딘스키 역시 수채 물감으로 그린 추상화를 그리다 좀 더 시일이 지난 후 유채 물감으로 그린 추상화를 시도한다. 나아가 그가 대상의 구체적 이미지를 버리고 완전한 추상에 도달한 것은 1913년경이다.

보는 이의 영혼을 춤추게 하는 음악적 회화
칸딘스키는 음악 애호가였다. 어릴 적부터 피아노·바이올린·첼로를 배웠고, 젊은 시절 한때는 음악가가 되고자 했다. 그런 만큼 ‘회화의 음악적 표현’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옅은 파랑은 플루트와, 짙은 파랑은 첼로와 비슷하다”는 식으로, 그에게 색채는 음과 같았다. 이런 음악적 효과는 색만이 아니라 형태와 구도에서도 찾을 수 있을 정도다. 그는 무형의 음악이 듣는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듯이, 형태와 색채도 보는 이의 가슴을 움직일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칸딘스키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형태와 색채의 리드미컬한 교접과 그로 인한 에너지의 생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칸딘스키도 파울 클레(1897~1940)처럼 음악의 자율성을 추상화에 적용했다. 1909년부터 1910년 사이에 제작한 작품에서 칸딘스키는 특히 음악적 에너지가 분출하는 추상의 형태와 색채를 창조하기 위해 매우 고심했다.

바실리 칸딘스키바실리 칸딘스키, ‘인상 3-콘서트’, 캔버스에 유채, 77.5×100cm, 1911
‘교회가 있는 무르나우 1’(1910)은 알프스 산자락에 있는 작은 마을 무르나우를 배경으로 한 풍경화다. 비사실적 색채가 강렬한 작품으로, 칸딘스키는 마을의 풍경을 자세히 묘사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흰 뾰족탑과 왼편의 주택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구체적인 형태 대신 색채의 조화로 마을의 분위기를 밝고 경쾌하게 표현했다. 특히 둘 이상의 색채를 병렬하거나 겹칠 때 나타나는 생생한 음향과 리듬에 주목하며 색을 소리처럼 울리고 꿈틀거리게 사용했다.
칸딘스키는 추상회화를 성립하는 영감의 원천으로 ‘인상(improvisation)’, ‘즉흥(impression)’, ‘구성(composition)’을 꼽았다. 그리고 이를 연작으로 제작하며 추상화의 진경에 도달한다.
‘인상’ 연작은 외부 자연으로부터 받는 즉각적인 느낌을 표현한 작품이다. 외부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제목으로, 이는 시각적인 인상뿐 아니라 비재현적인 방법으로 표현한 모든 종류의 감각적인 인상을 의미한다. 모두 36점에 달하는 ‘인상’ 연작은 대부분 1911년에 제작했다.

‘인상 3-콘서트’(1911)는 쇤베르크의 음악회에 다녀온 후 완성했다. 음악을 들을 때의 청각적인 인상을 시각화한 그림으로, 검은색 면은 무대 위의 그랜드피아노를 연상시키고, 왼쪽의 작고 검은 곡선들은 관람객을 떠올리게 한다. 대상의 재현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형태와 색으로 콘서트홀의 분위기와 소리를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칸딘스키에게 노란색은 소리를 상징하는 색으로, 홀을 가득 메운 쇤베르크의 음악을 의미한다. 회화와 음악이 서로 영향을 주는 공감각적인 표현이 아름답다.

바실리 칸딘스키바실리 칸딘스키, ‘즉흥 19’, 캔버스에 유채, 120×141.5cm, 1911
‘인상’ 연작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즉흥’ 연작은 1909년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칸딘스키에 따르면 “‘즉흥’은 무의식적이며 자연 발생적이고 내재적이며 비물질적인 전체의 특성을 지닌 표현”이다. 의식의 통제를 최소화하여 자유자재로, 1913년까지 모두 34점을 그렸다. 그는 이 연작을 통해서도 인물, 건물, 산 등 대상의 형태가 불분명하지만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추구했다. 예컨대 ‘즉흥 19’(1911)는 내면세계의 무의식적인 흐름을 표현한 것으로, 양쪽에 두 무리의 사람을 배치한 반추상 형태이다.

그리고 기하학적 형태를 의식적으로 배열한 ‘구성’ 연작이 있다.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상태의 ‘인상’과 ‘즉흥’ 연작을 보다 이성적으로 확장한 것이다. 1910년 처음 발표한 이래 1914년까지 총 7점을 제작했다. 이 연작은 칸딘스키 예술의 핵심에 해당한다. 비정형 추상화인 ‘구성 5’(1923)에 잘 나타나 있듯이, ‘구성’ 연작은 보는 이가 확인할 수 있는 이미지 대신 도형과 색채로 조형되어 있다. 추상적인 이미지의 화합과 조화를 꾀한 ‘구성’ 연작은 곧 추상화의 실질적인 창조였다. 1922년부터 바우하우스(1919~1933, 기능적이고 합목적적인 새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한 독일의 조형예술학교)에 초빙되어 교편을 잡으면서 그의 작품은 초기의 서정적인 추상에서 기하학적 형태의 구성적 추상으로 바뀌고, 최종적으로는 정교하게 세공한 몇 가닥의 주요 선만 남는다. 칸딘스키는 ‘신지학(Theosophy)’이라는 신비주의 사상에 심취한 화가답게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며, 추상화를 통해 영성이 없는 타락한 물질적인 구시대가 가고 위대한 정신적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보란 듯이 실천했다. 당시 대상 세계와 단절한 추상화는 유토피아의 회화적 실현을 의미했다.

바실리 칸딘스키바실리 칸딘스키, ‘하늘색’, 캔버스에 유채, 100×73cm, 1940
세상을 바꾼 비구상적 회화
음악은 예술가의 정신을 표현하는 가장 추상화된 예술 형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모든 예술은 음악을 동경한다”고 했다. 칸딘스키는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가장 비물질적 예술인 음악을 벤치마킹하여 추상적인 형태와 색채로 음악을 연주했다.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기에, 칸딘스키에게 색채는 음악의 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음악이 현실의 소리를 재현하지 않더라도 듣는 이의 영혼에 호소할 수 있듯이 색채와 형태, 구도도 그 자체로 보는 이에게 호소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자신만의 확고한 이론을 근거로 추상을 기획하고 일관되게 밀고 나간 칸딘스키는 20세기 초 미술계의 가장 혁명적인 사건으로 꼽히는 순수추상을 인류에 선사했다. 그는 20세기 미술의 스티브 잡스와 다름 아니다.

글 정민영(아트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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