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다 HOME
검색 분류
블로그 전송 카페 전송 밴드 전송 카카오스토리 전송 페이스북전송 트위터전송
제주에서 온 편지#8 그 섬에 가고 싶다
#8 그 섬에 가고 싶다
시골에 사니 별 게 다 눈에 들어옵니다. 계절에 따라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게 보이고 저녁 태양이 몸을 숨기는 자리가 달라지는 게 보입니다. 초록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던 들판에 어느새 하얀 솜털의 강아지풀이 무더기로 한들거리기 시작하면 바야흐로 가을.
제주에 온 이후로 가을이 왔다는 건 풋귤청을 담글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모든 과실수가 그렇듯 귤나무도 열매 솎아주는 작업을 하는데, 솎아낸 풋귤을 얇게 썬 뒤 설탕에 재워 잘 숙성시키면 새콤달콤하면서도 풋과일 특유의 쌉쌀함이 녹아든 독특한 맛의 청이 되지요.
아직 색도 안 올라온 초록빛 아기 귤이라 알도 작고 껍질도 얇지만 썰어보면 상큼한 과즙이 향과 함께 팡팡 터져서 입 안 가득 침이 고여요. 카페에서는 에이드로도 차로도 시그니처 커피의 재료로도 요모조모 쓰임새가 많아서 넉넉히 담가두면 김장김치 쟁여놓은 듯 든든하지요.

#8 그 섬에 가고 싶다마라도에서 바라보이는 제주본섬의 모습
제주에서 가을이 왔다는 건 막바지 물놀이에 피치를 올려야 할 때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람은 선선하고 햇살은 부드러워졌지만 한여름의 태양이 한껏 데워놓은 바닷물은 오히려 더 따뜻해서 휴가철 관광객들이 빠져나가 호젓해진 바다를 신나게 즐길 수 있지요. 요즘 제주 이주민들 사이에선 서핑보드와 스노클링이 인기에요. 틈 날 때마다 바다로 들어가는 친구들 말에 따르면 제주 바닷속에 동남아 못지않게 화려한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돌아다닌다고 하네요. 9월이 가기 전에 한번 들여다봐야겠어요.

#8 그 섬에 가고 싶다섬마을 해안을 따라 목걸이처럼 걸려있는 한치
#8 그 섬에 가고 싶다훼손되지 않은 마라도 해역은 대물이 많이 나오는 낚시 포인트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역시 가을은 떠나고 싶어지는 계절. 제주에 살면서 여행을 바라면 ‘그렇게 좋은 데 살면서 어딜 또 가고 싶냐’는 타박을 받기 십상이만, 육지에서처럼 마음만 먹으면 당장 어디로든 떠날 수가 없는 ‘섬’이라는 특성상 종종 답답함을 느끼기도 해요. 또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자동차로 내처 달리면 2~3시간 안에 닿는데도 어느 한쪽을 근거지 삼아 생업을 시작하면 반대쪽 가는 일이 서울 가기보다 힘들어지는 이상한 법칙(?) 같은 게 있어서 이리저리 제주를 누비는 관광객들보다 섬 반대편 사정에 어둡기 일쑤구요.

그러다 가을바람이 훅 불어와 등을 떠미는 어느 날, 떠나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해 선택하는 당일치기 여행지는 바로 섬 속의 섬입니다. 북쪽의 추자도, 동쪽의 우도, 남쪽의 마라도, 서쪽의 비양도… 무작정 배에 몸을 싣고 멀어지는 제주 본섬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떠남’에 충실한 장면은 없을 테니까요.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그 섬에 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사람들
각자가 하나의 섬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익숙한 듯 낯선 또 다른 섬의 선착장에 내리면 그 때부턴 온갖 사소한 것들에 정신이 팔립니다. 우선 섬의 오른쪽으로 돌까, 왼쪽으로 돌까 부터 결정해야 하죠. 떠나오기 전 머릿속을 채웠던 걱정거리들은 한 순간에 잊히고, 눈앞에 나타난 새로운 풍경들을 허겁지겁 주워 담기 바쁩니다. 오름이 넘실대는 본섬과 달리 사방이 탁 트인 섬 한가운데 서면 양팔을 벌려 빙빙 돌아보고 싶어져요. 바다를 향해 뻗은 길의 소실점이 세상의 끝인 듯 보여 괜히 오만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그 끝을 향해 달려가기도 하죠. 또 어느 섬에선 눈부시게 새하얀 산호모래 해변에서 모래 처음 보는 사람처럼 호들갑을 떨고, 투명하고 푸른 젤리 같은 바다에 소리를 꽥꽥 질러대며 첨벙첨벙 뛰어 들어가 모르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합니다. 어때요. 모르는 사람인데요. 떠난다는 것은 모르는 곳으로 가서 모르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요.
어쩌면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리고 계속 ‘아는 사람’으로 남기 위해 우리는 지나치게 애를 쓰며 살고 있는지도 몰라요. 심지어 여행하는 순간조차도 그 끈을 놓지 못하죠.

#8 그 섬에 가고 싶다관세음보살과 돌하르방이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인상적인 국토최남단 기원정사
#8 그 섬에 가고 싶다대한민국최남단비
“바다 제일 잘 보이는 자리가 어디에요?”
카페에 온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바다와 마주 앉을 수 있는 창가자리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온전히 바다에 집중하는 시간은 2~3분이나 될까요. 일행이 있으면 있는 대로, 혼자면 혼자인 대로 이내 시선은 휴대폰 화면으로 떨어집니다. 원치 않는데도 함부로 털어놓는 진심과 속 모르는 간섭을 피해,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며칠만이라도 머물기 위해 떠나왔다 할지라도, 온전히 나를 놓아주기보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남들에게 알리고 남들은 내가 없는 그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합니다. 그들은 누군가와 진정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그토록 절실히 바라는 걸까요.

#8 그 섬에 가고 싶다마라도 선착장. 해안 절벽을 따라 해식동굴이 형성되어 있다.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그 섬에 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사람들 각자가 하나의 섬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나라는 섬이 지겹고 지칠 때 다른 섬을 그리워하지요. 그러나 미처 가보지 못한 섬의 반대편을 아쉽게 남겨두고 돌아서듯이, 어느 부분은 모르는 채로 남겨두세요. 그래야 또다시 그 섬에 가고 싶어질 테니까요. 누구든 다시 당신에게로 오고 싶어질 테니까요.

돌아가는 배 시간에 맞춰 선착장으로 향합니다. 얼큰하게 끓인 보말칼국수와 곁들인 술 한 잔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당분간은 이 기분으로 버틸 수 있겠어요. 떠나는 배의 꽁무니에 서서 멀어지는 섬을 바라보며 아무에게나 손을 흔듭니다. 괜찮아요. 모르는 사람인걸요.

송혜령 방송작가글을 쓴 송혜령은 방송작가로, 대학 졸업 후 십수 년간 TV 교양 프로그램과 토크쇼ㆍ다큐멘터리 등을 만들면서 세상 사는 법을 배웠고,
독서와 여행을 통해 세상 읽는 법을 배우고 있다.
마흔 살이 되던 해 하던 일을 작파하고 주위의 부러움과 우려와 억측 속에서 남편과 함께 1년간 세계 여행을 감행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1년 만에 제주도로 이주, 동쪽 바닷가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여행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작가 블로그 | http://blog.naver.com/coolcool220

댓글 보기



삭제하기
TOP
페이스북 블로그 유투브 인스타그램
검색하기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