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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한 알로 세상을 놀라게 하다폴 세잔
폴 세잔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 캔버스에 유채, 74×93㎝, 1895~1900,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폴 세잔
후기 인상주의로 분류되는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은 ‘대기만성형’ 화가였다. 프랑스 최고의 미술 전람회로 꼽히는 ‘살롱전’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낙선(落選)했는데, 그럼에도 붓을 꺾지 않았다. 자신의 천재성을 믿은 것이다. 그런 그는 젊어서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50대 중반(1895)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개인전을 열고 비로소 발광(發光)하기 시작했다.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같은 거장이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그의 그림은 투박하지만 에너지는 강력해서 서양미술의 전통을 파괴할 만큼 혁명적이었다. 그는 단숨에 ‘현대미술의 아버지’가 되었다.
폴 세잔폴 세잔, ‘대수욕도’, 캔버스에 유채, 130×195㎝, 1898~1906,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폴 세잔폴 세잔, ‘체리와 복숭아’, 캔버스에 유채, 50×61㎝, 1883~1887,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소장
세잔의 성공 요인세잔은 수많은 화가에게 영감을 제공한 예술적 업적 외에 특별할 것이 없는 삶을 살았다. 그나마 성공 요인을 추려보자면 다음 몇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 번째, 세잔은 체질적으로 ‘혼족’이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캔버스를 찢는 것으로 화풀이를 할 만큼 성격이 고약해 인간관계가 매끄럽지 않았다. 50세부터는 가족과도 떨어져 홀로 지냈다. 혼자 고민하고 혼자 탐구하는 가운데, 화가로서의 열정과 집념을 동력 삼아 자신만의 조형 원리를 깊이 파고들었다. 순간의 인상을 포착한 인상파 화가들과 달리, 불변하는 영속적인 대상을 찾아 나섰다. 괴팍한 성격 탓에 고립 속에서 구도자처럼 작업했다.

두 번째는 몇 가지 주제에 집중해서 그림을 그렸다. 사과를 중심으로 한 정물화와 고향의 산(생트빅투아르산)을 그린 풍경화 그리고 목욕하는 사람들을 파고든 인물화(‘대수욕도’)를 통해 대상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했다. 일명 ‘세잔의 산’으로 불리는 생트빅투아르산 연작의 경우, 해발 1,000m 높이의 이 산을 주제로 그는 1870년부터 유화 44점과 수채화 43점을 남겼다.

세 번째는 주변에 2명의 든든한 멘토가 있었다. 훗날 견해 차이로 결별했으나 어린 시절부터 ‘절친’이었던 소설가 에밀 졸라는 세잔이 화가의 걸을 수 있도록 적극 도왔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입학한 법학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미술 공부를 시작한 것도 졸라의 권유 덕분이었다. 법학대학을 그만둔 세잔이 화가가 되고자 파리로 향했을 때, 당시 파리에 살던 졸라는 그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떨어져 있을 때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예술가로서의 내실을 다졌다. 또 다른 멘토는 열 살 연상의 화가 카미유 피사로였다. 세잔의 괴팍한 성격을 품어주고, 재능을 인정해준 피사로는 세잔이 화가의 길에서 방황할 때 힘이 되어준 정신적 스승이었다.

아버지의 경제적 후원도 빼놓을 수 없다. 세잔은 타고난 ‘금수저’였다. 대은행가였던 아버지의 경제력 덕분에 그림이 팔리지 않아도 생활고를 겪지 않으며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에는 약 40만 프랑(한화 약 70억 원)을 상속받았다.

세잔의 예술적 성공 뒤에는 이 같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과 더불어 세잔은 인상주의의 한계를 느끼고 이를 넘어서려고 했다. 당연히 당시 미술계의 비난과 조롱이 뒤따랐다. 하지만 세잔은 개의치 않았다. 놀라운 집중력과 몰입으로 서양미술사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었다.

인상파 회화에 불만을 품다세잔은 한때 인상주의자들과 뜻을 같이하며 작업했지만 관심과 방향은 달랐다. 알다시피 인상주의는 빛의 움직임에 따라 순간순간 변하는 색과 형태를 좇았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인상주의를 낳은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1872)를 보자. 이른 아침, 안개 속에 떠오르는 태양이 르아브르 항구를 물들이는 광경을 거친 필치로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세잔이 보기에 이 그림은 해돋이를 감동적으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빛에 따라 변하는 순간적인 상황을 포착하는 데 주력하다 보니 놓치고만 것이 있었다. 형태의 또렷함이 그것이다. 그랬다. 인상주의 그림에서는 빛나는 색채를 얻은 대신 형태는 흐릿하게 표현했다. 그렇다고 세잔이 인상주의 회화를 깡그리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빛의 순간을 포착하는 밝은 색채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세잔은 인상주의의 빛나는 색채를 유지하면서도 무시된 형태의 단단함을 살리고 싶었다.

“나는 인상파를 존경한다. 특히 그들의 빛나는 색채는 정말 훌륭하다. 그러나 나는 인상파의 그림에 만족할 수 없다. 인상파의 말대로 물체는 빛의 상태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빛에 따라 색채가 달리 보인다 해도 그림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게 바로 형태다.”
세잔의 성공은 여기에 있다. 그것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었다. 기존의 아카데믹한 방법으로는 소재의 입체감은 살릴 수 있는 대신 빛나는 색채는 포기해야 했다. 명암 처리에 따라 물체가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빛나는 색채를 얻기 위해서는 또렷한 형태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세잔은 전통 방식으로는 결코 합칠 수 없는 색채와 형태를 한데 결합하고자 했다.

폴 세잔폴 세잔, ‘부인과 커피포트’, 캔버스에 유채, 130.5×96.5㎝, 1890~1895,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폴 세잔 폴 세잔, ‘볼라르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100×82㎝, 1899년경, 파리 피티 미술관 소장
색채와 형태, 두 마리 토끼를 잡다‘카드놀이 하는 사람들’(1885~1890)은 카드를 쥐고 있는 두 사람이 주인공이다. 이 그림에서 빛은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비치고 있다. 그래서 얼굴 일부와 가슴이 그림자 속에 묻혔다. 그런데 모자에는 빛이 오른쪽에서 비친다. 기이한 상황이 펼쳐졌다.

당시 전통적인 명암법으로 보면, 이는 명백히 잘못된 표현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그림의 원칙은 한쪽 방향에서 비치는 빛을 따라 소재를 묘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잔은 빛의 방향을 마음대로 조정했다. 파격이었다. 그림의 원칙을 깨는 불경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행위였다. 르네상스 이후 사실주의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간 서양미술을 지탱해오던 원근법과 해부학, 명암법 같은 조형 원리를 뿌리째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를 포기한다는 뜻이자, 외부의 구체적인 현실보다 화면 내부의 구성이 더 중요하는 것을 의미했다. 미술의 본질을 형태에서 찾았던 세잔의 유명한 선언은 이로써 의미가 선명해진다. “미술의 본질은 형태에 있고, 지상에 있는 모든 형태는 구(球), 원통, 원뿔이라는 본질적인 형태로 단순화시킬 수 있다!”

세잔은 파격으로 새로운 격(格)을 세우며, 한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그에게 카드놀이 하는 사람의 머리는 구였고, 목과 팔과 몸통은 원통이었다. 그렇기는 첫 개인전을 열어준 화상(畵商) 앙브루아즈 볼라르를 그린 ‘볼라르의 초상’(1899년경)이나 부인의 초상인 ‘부인과 커피포트’(1890~1895)도 마찬가지다. 엄격한 기하학적 구도 속에 배치된 인물들이 구, 원통으로 조형한 사물처럼 딱딱하고 단단해 보인다.

세잔은 미술의 본질은 형태에 있다고 생각했다. 형태는 보는 사람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띤다. 동일한 사과도 위에서 볼 때와 아래서 볼 때, 옆에서 볼 때 모양이 각기 달라 보인다. ‘사과와 오렌지’(1895~1900)는 사과와 오렌지가 놓여 있는 정물을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 역시 우리가 흔히 접하는 정물화와 다르다. 무엇보다 각 소재의 포즈가 자연스럽지 않다. 왼쪽의 사과 접시는 오렌지가 담긴 접시와 다르게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마치 위에서 내려다본 것 같다. 사과가 금방이라고 굴러 떨어질 듯하다. 원근법의 원리를 지키는 전통적인 조형 원칙에 따르면, 모든 작품은 하나의 시점으로 그려야 하는데, 세잔은 다중 시점을 사용했다. 왜 그랬을까? 각 소재가 지닌 형태적 특성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오른쪽 위의 접시는 원근법적 시점을 포기해 고의로 형태를 왜곡시켰다. 가장 그릇다운 그릇을 표현하기 위해,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으로 그린 것이다. 세잔은 이렇게 시점을 옮겨가며 본 것들을 한 화면에 편집했다. 그 결과 원근법에는 어긋나지만 전체적으로 안정감과 더불어 화면이 꽉 찬 느낌을 준다. 비슷한 시기에 그린 ‘체리와 복숭아’(1883~1887)에도 원근법은 파괴되어 있다. 복숭아 접시와 체리 접시가 한 그림에 서로 다른 시점으로 공존한다.

세잔은 명암법에 이은 원근법의 파괴로 서양미술의 토대가 되는 주 기준을 깨버렸다. 비난과 냉대가 쏟아졌지만 젊은 화가들은 환호했다. 미술의 새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세잔 이후, 미술은 외부 세계를 묘사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림 내부의 조형 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폴 세잔폴 세잔,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캔버스에 유채, 57×47.5㎝, 1885~1890,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폴 세잔폴 세잔, ‘생트빅투아르산’, 캔버스에 유채, 73×91㎝, 1904~1906
90여 점에 이르는 ‘세잔의 산’세잔은 생트빅투아르산도 ‘사과’처럼 그렸다. 정물화에서 시도한 물체의 구조 탐색을 자연에까지 확대한 것이다. 고향인 남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 우뚝 솟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을 그린 연작 가운데, 만년의 작품인 ‘생트빅투아르산(1904~1906)’에서 볼 수 있듯이 무수한 색채의 면이 서로 밀고 당기는 가운데 형태가 드러나고 입체감이 만들어진다. 그는 색을 통해 형태를 확립하고 공간 구성을 견고하게 했다. 그림을 보면, 근경에 초록빛 평원이 있고, 그 뒤의 중경에 수풀 지대가, 그리고 원경에 생트빅투아르산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단순한 구성에, 색채와 거친 붓 터치가 두드러진다. 색채와 붓 터치만으로 원근과 입체감과 형태를 표현했다. 그래서 ‘세잔의 산’을 처음 본 희곡 작가 페터 한트케는 그림과 실물이 너무 달라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실제로 앞에서 바라보면 생트빅투아르산은 세잔이 그린 산과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그림과 달리 너무도 기이하고 독특한 형상 탓인지 ‘세잔이 정말 이 산을 그린 것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그것은 세잔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산을 그리기보다 머리로 느끼고 마음으로 재구성하며, 산에 단단한 형태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세잔은 이렇게 말했다. “그림이란 느낌의 조합이다. 다시 말하면 색과 윤곽 그리고 면의 관계를 창조해내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세잔의 파격적인 조형 세계는 샘이 깊었다. 지적이고 기하학적인 조형 원리에 힘입어 파블로 피카소로 대표되는 입체파와 앙리 마티스의 야수파가 등장했다. 피카소는 세잔의 작품에서 평면에 형태를 요리하는 법을 배웠고, 마티스는 세잔에게서 풍부한 색채를 발견했다. 그래서 피카소는 사물에서 형태를, 마티스는 사물에서 색채를 독립시킬 수 있었다. 형태와 색채는 더 이상 사물에 종속되어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사물을 재현할 의무에서 벗어난 형태와 색채의 자유로운 구사는 칸딘스키의 추상미술을 낳으며 20세기 미술로 번창한다. 그만큼 현대미술에 끼친 세잔의 영향은 깊고도 넓다. 피카소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세잔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나의 유일한 스승 세잔은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글 정민영(아트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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