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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온 편지#9 제주별의 가을
#9 제주별의 가을
당신이 <어린왕자>를 마지막으로 읽은 건 언제일까요. 참 이상하게도 이 책은 책장에 꽂혀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마음이 애잔해져서 쉽사리 펼쳐들게 되질 않았어요. 핑계란 고작 이 정도 ― ‘다 아는 얘기잖아. 그리고 이미 나는 진짜 중요한 게 뭔지 모르는 어른인걸.’
순전히 가을이기 때문이겠죠, 그렇게 꽂아놓고 바라보기만 하던 책을 다시 꺼내든 까닭은. 그리고 순전히 그 삽화 때문이었어요, 오름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까닭은. 어린왕자가 빗자루로 자기별의 화산을 청소하고 있는 그림.

#9 제주별의 가을억새밭 너머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오름이 보인다.
화산섬 제주엔 어머니 한라산 아래로 무려 368개의 오름이 있습니다. 제주 방언으로 ‘자그마한 산’을 뜻하는 오름은 둥글고 완만한 경사를 가진 동산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라산에 딸린 기생화산들이죠. 한라산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생화산을 거느린 화산이라는 사실도 놀랍지만, 크든 작든 368개 오름 하나하나마다 제각각 맞춤한 이름이 붙어 있다는 것도 놀랄 만한 일이에요. 균형이 잘 맞게 파인 분화구가 달처럼 보인다고 해서 ‘달랑쉬’(다랑쉬)오름, 오름의 능선이 용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용논이’(용눈이)오름, 허허벌판에 솟아있는 모습이 초저녁 외롭게 떠 있는 샛별 같다 해서 ‘새별’오름 등등. 특히 한라산 동쪽의 중산간 지역은 제주에서도 오름이 가장 높은 밀도로 모여 있고 그만큼 유명한 오름들이 많지요.

#9 제주별의 가을
#9 제주별의 가을오름 주변은 주로 황무지나 목장지대로 말이나 소를 흔히 볼 수 있다.
말과 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는 오름의 초입으로 들어섭니다. 어린왕자의 소행성에라도 도착한 듯 마음이 설레는 것은 숨 한번 깔딱거릴 만만큼의 수고만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지 알기 때문일까요. 때마침 이즈음의 오름엔 하얗게 꽃을 피운 억새가 장관입니다. 바람에 출렁이는 억새를 보며 흔히 억새의 ‘춤사위’라고들 표현하지만, 멀리서 바람이 불어오면 일제히 몸을 눕혀 길을 터주고 지나간 후엔 손을 높이 들어 흔드는 모습이 내겐 어쩐지 애달프기까지 해서 차마 걸음을 재촉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오름의 꼭대기에 올랐습니다. 예의 한라산에서 시작된 오름의 능선들이 바다를 향해 부드럽게 출렁입니다. 분화구를 따라 한 바퀴 돌면 황량한 벌판에 우뚝 서 있는 바람개비와 까만 밭담과 초록의 숲과 물안개에 싸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아득한 옛날, 한라산이 분화할 때는 백록담뿐 아니라 368개 오름의 분화구에서도 일제히 불을 뿜어 섬 전체가 불타올랐겠지요. 그때를 상상하며 해가 질 때까지 오름에 머물렀습니다. 가을 햇빛은 참으로 고와서 은백색의 억새꽃을 금세 금빛으로 물들이더니 이내 빨갛게 일렁이기 시작합니다. 제주 섬 전체가 불붙는 시간. 하루에 한 번, 아득한 옛날로 돌아가는 시간.
나는 어느 날 마흔네 번이나 해넘이를 보았다던 어린왕자를 떠올렸고, 그때 어린왕자의 얼굴이 지금 지는 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 같았을까 생각했고, 물들이고 길들이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여우가 말했죠. “네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너의 장미에게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9 제주별의 가을다랑쉬오름에서 내려다본 아끈다랑쉬(작은 다랑쉬)오름. 멀리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선명하다.
한 과학 저널리스트가 이런 내용의 강의를 한 적이 있어요.
“미국의 한 연구소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한 일이 있다. 한 그룹은 가볍고 재미있는 수다, 다른 한 그룹은 심각한 토론을 30여 분간 나누게 한 뒤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측정한 것이다. 두 그룹의 뇌를 촬영한 결과 가벼운 수다를 나눈 그룹의 전두엽은 빨갛게 활성화되어 있는 반면 토론을 나눈 그룹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시험을 치른 결과도 수다를 나눈 그룹이 15%P 가까이 높게 나왔다. 이 논문 주제를 한 언론은 이렇게 재치 있게 요약했다. ‘친구는 머리에 좋다’라고. … 하지만 인간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7%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보다 비언어적인 표정, 몸짓, 억양 등으로 훨씬 많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중 특히 중요한 것이 눈빛이다. 뇌 과학자들은 ‘응시가 뇌를 조각한다’고 말한다.”

#9 제주별의 가을해 질 녘 용눈이오름에서 바라본 풍경. 한라산의 실루엣이 선명히 보인다.
당신과의 시간을 떠올려봅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저 사는 이야기를 지껄이고, 아는 누군가를 흉보거나 또 부러워하거나, 점점 더 뒷걸음치는 세상에 혀를 차거나, 마음속에 묻어뒀던 이야기들을 꺼내놓거나, 할 말이 떨어지면 서로 바라보며 웃었을 뿐인데 헤어져 돌아가는 길엔 언제나 가슴 언저리가 뜨끈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달라져왔습니다. 당신이 내 머릿속에 빨간 불을 밝힌 만큼, 당신의 눈빛으로 내 머릿속에 새겨 넣은 그림만큼. 어쩌면 내 변화의 시작은 당신이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내가 당신에게 소비한 시간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물들고 길들어 이토록 소중한 사람이 되었나봅니다. 당신 곁에 오래오래 남고 싶습니다.


송혜령 방송작가글을 쓴 송혜령은 방송작가로, 대학 졸업 후 십수 년간 TV 교양프로그램과 토크쇼ㆍ다큐멘터리 등을 만들면서 세상 사는 법을 배웠고, 독서와 여행을 통해 세상 읽는 법을 배우고 있다. 마흔 살이 되던 해 하던 일을 작파하고 주위의 부러움과 우려와 억측 속에서 남편과 함께 1년간 세계 여행을 감행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1년 만에 제주도로 이주, 동쪽 바닷가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여행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작가 블로그 | http://blog.naver.com/coolcool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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