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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온 편지#10 늦가을의 위로
#10 늦가을의 위로
11월입니다. 당신이 있는 그곳의 풍경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단풍 물들던 거리의 가로수 아래로 가을색이 소복이 쌓여가고 철없는 아이들은 낙엽 위를 뒹구느라 분주하겠죠.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위로 어느 날 가을비가 후두둑 떨어지고 나면 옷깃을 여민 당신의 퇴근길, 길가의 만두 가게며 포장마차에서 새어 나오는 새하얀 김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들다 흩어질 거예요.
#10 늦가을의 위로억새 너머로 보이는 무밭의 어린잎. 마치 가을과 봄이 공존하는 듯한 풍경이다.
맞아요. 3년 전만 해도 내게 늦가을 풍경이란 그런 것이었죠. 하지만 여기 제주의 11월은 중산간을 하얗게 뒤덮은 억새를 빼면 여전히 초록입니다. 심지어 빼곡하게 밭고랑을 메운 당근이며 월동무의 푸른 잎사귀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을 거슬러 다시 봄이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해요.
문제는 바람이지요. 11월이 되면 제주엔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사나운 바람은 구름을 몰고 와 하늘과 바다를 온통 푸른 잿빛으로 물들이고, 파도를 일으켜 세워 안 그래도 스산해진 마음을 할큅니다. 한나절 동안에도 맑았다 흐렸다 반복하는 변덕스런 날씨에 기분마저 롤러코스터를 타곤 하지요.
“또 겨울이 오려나봐.”
어깨를 움츠리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누는 인사. 제주 이주민들은 11월의 바람과 함께 너나할 것 없이 약간의 우울감에 빠지는 것 같아요. 이 바람은 짧으면 내년 2월, 길면 3월까지 쉴 새 없이 불어댈 테니까요. 그래서 이즈음엔 운영하던 게스트하우스나 카페를 잠시 닫고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풍성한 제주의 먹거리들이겠죠.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감귤입니다. 10월부터 극조생 감귤을 수확하지만 제대로 맛이 든 조생귤은 11월 중순부터 나오기 시작해요. 야트막한 돌담으로 경계 지은 귤밭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키 낮은 나무에 가지가 휘어지게 매달린, 가을 오후의 햇살을 닮은 귤을 구경합니다. 4월 어느 밤 퇴근길 차에서 내렸을 때 마당 가득 고여 있던 아카시아처럼 알싸한 귤꽃의 향기, 꽃이 지면서 작은 구슬처럼 알알이 매달리기 시작하던 5월의 열매들, 한여름 태양 빛을 야무지게 움켜쥐어 제법 실하게 차올랐던 8월 풋귤의 상큼함까지 귤의 역사가 한눈에 다 보이는 걸 보니 어느덧 제주살이 4년 차라는 게 실감이 나네요.

#10 늦가을의 위로알알이 영글고 있는 감귤
#10 늦가을의 위로제주에서 쓰는 빨간 귤 바구니
‘제주 살면서 귤을 돈 주고 사 먹으면 잘못 산 것’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귤 수확철이 되면 여기저기 귤이 넘쳐납니다. 어느 집을 방문하더라도 나올 때 손에 귤 한 봉지씩은 꼭 들려 있기 마련이고, 카페에서도 공짜 귤을 쌓아놓고 집어 가게 할 정도로 인심이 후해지는 시기죠. 일손이 부족한 귤밭으로 일당 벌이를 나갔던 친구들이 족히 한 상자는 되는 귤을 덤으로 받아 와 던져주고 가기도 해요.
바다는 바다대로 특별한 먹거리를 내어줍니다. 이 무렵 제주에서 가장 많이 잡히는 어종은 방어. 물고기는 몸집이 클수록 맛있다고 하죠. 보통 무게가 5kg 이상이면 ‘대방어’라고 부르는데, 씨알 작은 것들에 비하면 완전히 다른 어종이라 할 만큼 맛이 좋고 양도 푸짐한 데다 참치처럼 부위별로 다른 맛을 내니, 대방어를 먹겠다고 섬을 가로질러 서남쪽의 모슬포까지 가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합니다.

#10 늦가을의 위로돌담을 뒤덮은 담쟁이넝쿨에도 가을이 흠뻑 물들었다.
다른 계절, 다른 바다에서 잡히는 방어보다 유독 제주 모슬포의 겨울 방어를 최고로 치는 이유는 바람이 모질고 물살이 센 제주 겨울 바다를 헤엄치느라 몸집이 커지고 살이 단단해지는 데다가, 모슬포와 마라도 앞바다에 방어가 좋아하는 먹이인 자리돔이나 전갱이가 많아서 봄 산란기를 앞둔 방어에 한껏 기름이 오르기 때문이라네요. 여럿이 돈을 갹출하면 더 저렴하게 더 크고 맛있는 대방어를 사 먹을 수 있는 만큼, 찬 바람이 불면 평소 마음 맞는 이웃들끼리 삼삼오오 대방어 원정팀을 꾸릴 궁리들을 하지요. 도시처럼 아무 때나 대리 기사님을 부를 수 없는 곳이기에 멤버 중엔 술을 못하거나 참을성 있는 친구가 반드시 끼어 있어야 해요. 그 좋은 안주에 술 한잔 안 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게 한바탕 이벤트가 끝나고 나면 ‘이 긴 겨울을 또 무슨 낙으로 사나’ 하며 이불 속을 파고들겠죠.

#10 늦가을의 위로겨울에도 땅이 얼지 않는 제주의 밭엔 초가을에 파종한 당근이나 월동무의 푸른 잎이 가득하다.
#10 늦가을의 위로매년 11월이면 서귀포시 모슬포항 일원에서 '최남단 방어축제'가 열린다.
예전부터 친구들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주고받던 말이 생각납니다. 인생엔 ‘총량의 법칙’이란 게 있다고. 살면서 겪게 되는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평온함과 화남, 즐거움과 눈물 따위의 양은 정해져 있어서 마냥 좋거나 나쁘기만 한 인생은 없는 거라고.
눈부시게 빛나는 봄, 여름, 가을을 보냈으니 겨울 한 철쯤은 스산하고 우울해도 기꺼이 견뎌야 하는 거겠죠. 하지만 그 와중에도 넉넉한 인심과 맛난 먹거리들로 자꾸 추워지려는 마음을 달랠 수 있으니, 혹시나 여기 제주에서 우리 인생에 정해진 양의 행복을 다 써버리는 건 아닐까 바보 같은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언제일지 모를 날로 행복을 미뤄두고 싶진 않네요. 이번 겨울엔 나에게 주어진 행복의 총량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시험해볼까 봐요. 최선을 다해 기를 써서 행복해질까 봐요.
바람이 붑니다. 지금부터 다시 행복해질 시간입니다.

송혜령 방송작가글을 쓴 송혜령은 방송작가로, 대학 졸업 후 십수 년간 TV 교양프로그램과 토크쇼ㆍ다큐멘터리 등을 만들면서 세상 사는 법을 배웠고, 독서와 여행을 통해 세상 읽는 법을 배우고 있다. 마흔 살이 되던 해 하던 일을 작파하고 주위의 부러움과 우려와 억측 속에서 남편과 함께 1년간 세계 여행을 감행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1년 만에 제주도로 이주, 동쪽 바닷가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여행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작가 블로그 | http://blog.naver.com/coolcool220

댓글 보기
미생
2017.11.21
제주도에서의 삶이 너무나도 행복해보여 부럽네요. 누구나 한본쯤은 꿈 꾸어보지만 현실속에서 포기가 되는데...
참 좋아보입니다. 대방어 지금이 제철이죠? 맞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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