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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화가 이인성,조선의 향토 색을 밝히다
조선의 향토 색을 밝히다이인성, ‘아리랑 고개’, 종이에 수채, 58×77.5㎝, 1934,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이인성은 확실히 혜성처럼 등단한, 서양화 정착기의 천재였다. 그의 예술이 서양화가 한국에 정착하는 데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는 1950년대까지 지속된 그의 모방작과 아류를 통해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오광수, 미술평론가)
조선의 향토 색을 밝히다이인성, ‘한정’, 캔버스에 유채, 1936, 소재 불명
스타 탄생, 그리고 수채 풍경화에서 유채 인물화로1912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인성(1912~1950)은 오로지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에 전력투구하여 성공한 화가다. 대구 수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화가 서동진(1900~1970)이 경영한 ‘대구미술사’에서 인쇄와 도안 일을 하며 수채화를 배웠다. 18세의 나이에 1929년 열린 제8회 조선미전에 ‘그늘’로 처음 입선한 후, 마지막 회인 제23회(1944)까지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15년간 총 33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그 결과 2회 입선(제8·9회)과 6회 연속 특선(제10~15회)을 하고, 불과 25세에 ‘추천 작가’(제16회~)가 되는 등 승승장구하며 미술계에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더욱이 제14회(1935) 조선미전에서는 ‘경주의 산곡에서’(1934)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며 수상 경력이 절정에 달했다.
행운도 따랐다. 1931년, 한 일본인 교장의 추천으로 일본 크레용 제조회사에 취직한 것이다. 이 회사에 다니는 동안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태평양미술학교(대학이 아닌 학원) 야간부에서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았다. 공모전에 대한 야심은 유학 중에도 계속되었다. 대구와 도쿄를 오가며 조선미전과 일본의 관전(官展)에 적극 출품했다. 일본에서도 최고 권위의 ‘제국미술전람회’(이하 ‘제전’)와 ‘신문전(新文展)’에 총 5회 입선하는가 하면, 재야 공모전인 ‘일본수채화전람회’와 ‘광풍회(光風會)’전에도 도전하여 총 4회 입선하며 경력을 쌓았다.

조선의 향토 색을 밝히다이인성, ‘경주의 산곡에서’, 캔버스에 유채, 136×195㎝, 1934,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그는 풍경화로 미술을 시작했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서양화가들에게 수채화를 배운 뒤, 일본 유학 이전까지 줄곧 수채물감으로 풍경화를 그린 것이다. 당시 비싼 유채물감을 살 능력이 없었던 대부분의 화가처럼 이인성도 주로 수채물감을 이용해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때 인물화는 단 한 점도 그리지 않았다. 그가 풍경화에서 인물화로 전환한 때는 1931년부터 1935년까지, 일본에 유학하던 시절이다. 유채물감 사용과 인물화 기량 습득은 단연 일본 유학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재료의 변화도 한몫했다. 미술 재료를 만드는 회사에 입사한 덕분에 유채물감 같은 양질의 재료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작품의 발전 과정을 재료 면에서 살펴보면, 이인성은 수채화에서 유화로 나아갔다. 수채로 시작한 만큼 조선미전에 출품한 초기 작품은 모두 수채화였다. 그러다가 조선미전에 유채화를 출품하기 시작하는 때는 일본 유학 중인 1935년 무렵이다. 그는 수채보다 유채에 큰 비중을 두었다. 발색이 담백하고 산뜻한 수채로는 주로 크기가 작은 풍경화를 그렸고, 두텁고 묵직한 느낌을 주는 유채는 대작(大作) 제작이나 인물 묘사에 이용했다. 소재 면에서는 풍경화에서 시작하여 인물화나 정물화로 확장되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유채를 사용하면서 생긴 변화다. 특히 일본 유학 이후에는 인물화의 비중이 급격히 증가하는데, 이는 그의 회화가 지향한 것이 인물화였음을 보여준다.
이인성의 대표작으로는 조선미전 출품작인 ‘가을 어느 날’(1934)과 ‘경주의 산곡에서’, ‘한정(閑庭)’(1936), ‘해당화’(1944) 등을 꼽는다. 이 작품 중에서 이인성 예술의 진경을 보여주는 ‘가을 어느 날’과 ‘경주의 산곡에서’는 ‘풍경과 인물’로 구성된, 풍경에서 인물로 그림의 대상이 바뀌는 전환기의 작품이다.

조선의 향토 색을 밝히다이인성, ‘해당화’, 캔버스에 유채, 224×140㎝, 1944,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강렬한 원색으로 그린 조선의 풍광청명한 하늘과 온갖 식물이 가득한 가을 들녘에서 정면을 돌아보는 반라(半裸)의 여인과 뒷모습의 소녀가 등장하는 ‘가을 어느 날’은 탄탄한 구성력에 풍부한 색채감과 연속적인 터치가 돋보이는 대작이다. 이 작품은 언뜻 폴 고갱(1848~1949)의 ‘모성애’(1886)을 연상시키지만 실존 인물을 토대로 그렸다. 단발머리 소녀는 이인성의 동생 ‘인순’이고, 한국적인 체형의 반라 여인은 ‘영자’라는 지인이다. 바구니와 보자기 또한 이인성이 갖고 있던 소품들이다. 그는 비록 서양 근대회화에 양식적인 근원을 두기는 했지만 주변의 일상적인 사물과 평범한 사람들을 모델로 향토적인 형태와 정서가 풍기는 작품을 완성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적갈색의 여인과 식물과 대지의 진한 원색 때문에 조선의 향토 색이 극적으로 빛난다. 이 작품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붉은 흙색은 ‘경주의 산곡에서’에서 더욱 강렬해진다.
경주 남산 자락의 붉은 산야를 배경으로 아이를 업고 있는 소년과 앉아 있는 소년이 주인공인 작품이 ‘경주의 산곡에서’다. 황토빛 붉은색이 진하다. 붉은 흙색은 조선의 색채를 상징한다. 이인성도 붉은 흙(赤土)을 푸근한 고향의 이미지로 인식하고 있었다. 시선의 흐름도 의미심장하다. 캔버스의 왼쪽에 배치한 나무에서 시작된 시선은 아기를 업은 소년에게 가닿고, 소년이 바라보는 지점에는 첨성대가 놓여 있다. 다시 건너편에 앉아 있는 소년에게 시선이 갔다가 마지막으로 바닥에 있는 깨진 기왓장에서 멈춘다. 고도(古都)의 상징물인 깨진 기왓장과 첨성대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상황과 어우러져 장중한 비극미를 선사한다. 경주라는 특정 지역이 환기하는 회고적 취향과 향토적인 색채는 이 작품을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이인성은 이렇게 해서, 1930년대에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한 조선 향토 색의 전형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풍경화를 역사화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았다.
미술사가 윤범모는 같은 해에 제작된 이들 작품에 나타난 불일치 현상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가을 어느 날’은 봄에, ‘경주의 산곡에서’는 가을에 그렸다. 그런데 두 작품을 그린 곳은 일본이다. 즉 국내에서 사생해 그린 작품이 아니라 기억을 되살려 연출한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발생한 흥미로운 현상이 있다. 작품 내용과 공간의 불일치, 작품 내용과 계절의 불일치가 그것이다. ‘가을 어느 날’처럼 봄에 가을 풍경을 그렸다거나 ‘경주의 산곡에서’처럼 도쿄에서 경주 풍경을 그렸다는 사실이다. 이런 계절의 불일치는 10여 년 후에 제작된 ‘해당화’에서도 발견된다.

조선의 향토 색을 밝히다이인성, ‘여름 실내에서’, 종이에 수채, 71×89.5㎝, 1934,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다시 다른 작품을 보면, 피에르 보나르(1867 ~1947)의 실내를 소재로 한 작품이 연상되는 ‘여름 실내에서’(1934)가 있다. 이 작품은 당시 일본 제전에서 유행하던, ‘풍경의 일부가 내다보이는 창문 앞의 정물’이라는 주제와 통한다. 불투명 수채로 그린 화려한 원색과 수직ㆍ수평의 구획한 화면의 짜임새 등이 돋보이는 가운데, 창밖의 풍경과 번쩍번쩍한 소품이 놓여 있는 실내가 이국적이다. 그런 곳에 맥락 없이 배치된 색동 고무신 한 켤레가 눈길을 끈다. 한민족을 상징하는 색동 고무신으로 슬쩍 국적과 자존심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제22회 일본수채화전람회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아리랑 고개’(1934)는 당시 경성(지금의 서울)의 돈암동에서 정릉으로 넘어가는 아리랑 고개를 포착한 것으로, 산비탈의 집들과 고갯길, 아래쪽의 사각형과 원, 직사각형 같은 기하학 형태를 도입한 특이한 작품이다. 그런데 작품 제목에서 연상되듯이 이인성은 영화 <아리랑>(1926)을 제작한 나운규처럼 민족의식이 충만해 ‘아리랑 고개’를 그린 것이 아니다. 당시 일본 화단에 유행한 폴 세잔(1839~1936)의 영향이 작용했다. 그것도 세잔이 줄기차게 그린 생트빅투아르산을 아리랑 고개에서 발견한 것 같다.
이들 작품은 하나같이 전위적이거나 혁신적인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관전에서 선호하는 아카데믹한 스타일을 추종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런 경향이 “조숙한 성장과 불우한 환경이 만드는 조급한 출세욕”(오광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는다.

조선의 향토 색을 밝히다이인성, ‘가을 어느 날’, 캔버스에 유채, 95.9×161㎝, 1934,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조선의 향토 색을 밝히다이인성, ‘애향’, 캔버스에 유채, 45.5×38㎝, 1943년경, 개인 소장
불일치로 표현된 모순의 시대이인성의 작품은 피리 부는 소년이 등장하는 향토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한정’ 이후 완전한 인물화로 바뀐다. 또 수채와 유채를 넘나들었지만 비중 있는 작품은 반드시 유채로 인물을 그렸다. 이 유채 인물화의 결정체가 바로 조선미전 마지막 회에 출품한 ‘해당화’다. 당대 현실을 반영한 담론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한 ‘가을 어느 날’, ‘경주의 산곡에서’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술사가 이중희는 이 작품을 “인체의 자신감 있는 표현이 목표였던 이인성 기량의 정점”으로 친다.
바닷가에 해당화가 피어 있고, 앉아 있는 여인과 그 뒤에 선 2명의 소녀가 주인공이다. 아카데믹한 화풍답게 이 작품에서는 인체에 대한 묘사가 비교적 정확하고 사실적이다. 1930년대 작품에 나타난 인물들의 미숙한 묘사와 달리 비례며 표정이 살아 있다. 그만큼 인물화의 기량이 향상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계절의 불일치 현상도 이 작품의 특징이다. 해당화는 여름 꽃인데, 사람들은 추운 계절의 옷차림을 하고 있다. 이런 불일치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일제강점기라는 모순의 시대를 공간이나 계절의 불일치로 나타낸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화가가 뚜렷하게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대 상황을 표현했다고 말이다.
이인성은 ‘공모전 헌터’였다. 생전에 빠짐없이 참가한 ‘조선미전 개근생’으로, 15년간 그린 관전 출품작은 하나같이 정성을 다해 그린 대작이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그로 인한 명성을 누리며 작가로서 날개를 폈으나 한국전쟁 중 경찰관과의 시비 끝에 총기 사고로 요절함으로써 약 20년간 계속된 그의 작품 활동은 갑자기 끝이 났다. 그럼에도 한국적인 정서와 색채, 소재를 토착화하고자 한 그의 작품과 작업 태도는 우리나라 근대 서양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즉 조선미전의 뒤를 잇는 ‘대한민국미술대전’(1949~1981)에 계승된 이인성 화풍은 197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글 정민영(아트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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