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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온 편지#11 다시, 동백
#11 다시, 동백
계절이 한 바퀴 돌아 다시 겨울. 어느새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네요. 올해도 어김없이 동백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웬만해선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날씨, 눈도 거의 내리지 않는데다가 그 흔한 대형 크리스마스트리 하나 구경하기 힘든 제주 시골에선 동백꽃의 개화로 겨울이 왔음을 실감합니다. 꽃소식으로 12월을 맞다니 역시 제주답지요. 반질반질 윤이 나는 초록색 잎사귀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민 핏빛 붉은 동백의 꽃말은 ‘그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11 다시, 동백애기동백 등 외래종이 꽃잎을 한 장 한 장 떨어뜨리며 지는 것과 달리 토종동백은 송이 째로 꽃을 떨군다.
송이 째 툭툭 떨어지는 동백의 낙화가 그토록 애틋한 것은 아마도 이렇게 아름다운 꽃말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동백꽃은 겨우내 피고 지기를 반복하면서 마을의 조붓한 올레길에 붉은 양탄자를 깔겠지요.
그렇다고 제주의 겨울이 마냥 꽃피는 봄 같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타원형으로 길게 펼쳐진 제주섬은 매섭게 몰아치는 한겨울의 북풍을 어느 방향에서 맞게 되느냐에 따라 기온이 달라지는데, 예를 들어 한라산이 바람을 정면에서 막아주는 남부 지역은 비교적 따뜻하지만 동부나 서부는 북풍이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훨씬 춥게 느껴지지요. 특히 바람이 세기로 유명한 동부 바닷가 마을에선 제주 땅 어디에나 다 있을 것 같은 귤밭 조차 보기 힘들어요. 대신 땅 속으로 자라는, 그래서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는 당근이나 무를 많이 재배하지요.

#11 다시, 동백제주에서 가장 먼저 겨울이 시작되는 한라산. 올해는 11월 중순에 첫 눈이 내렸다.
바람 때문에 살기 힘들어 제주 다른 지역에 비해 개발이 더뎠고 그래서 땅값도 비교적 저렴했고 그래서 제주 원주민들보다 이주민들이 더 선호하는 지역이 되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그 바람에 몇 해 시달린 동쪽 이주민들 사이엔 ‘돈 벌어서 서귀포로 이사 가자’는 말이 겨울을 잘 견디자는 덕담이자 위로이기도 하답니다.
쉬는 날이면 무조건 따뜻한 남쪽의 동백숲이나 감귤밭으로 달려가서 해바라기 할 생각만 하는 나에게 친구들은 말합니다.

“제주에 살면서 한라산 한 번은 가야지. 눈 덮인 한라산이 얼마나 근사한데.”
한겨울의 한라산 등반이라니. 지난 가을 한라산 영실의 단풍이 절정이라는 뉴스의 호들갑에 덜컥 길을 나섰다가 역시 산은 올라가는 게 아니라 보는 거라는 평소의 소신만 확인한 채 후들거리는 무릎을 붙잡고 발길을 돌렸던 나로서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제안이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숙제 같기만 합니다. 올겨울엔 이 숙제를 해낼 수 있을까요.

#11 다시, 동백폭설이 내리지 않는 한 좀처럼 눈 쌓인 모습을 볼 수 없는 제주에서 한라산은 겨우내 설경을 만끽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연말. 해결해야 할 숙제처럼 만나야 할 사람이 많아지는 때이지요. 어쩌면 당신의 다이어리는 벌써 이런저런 약속들로 빼곡히 채워지고 있을 거에요.
제주에 내려와 카페를 차리고 난 이후로 만남이란 늘 수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래 알고 지낸 이들과의 만남은 그들이 바다라는 거리를 극복해야 가능하고, 또 여기서 새로 알게 되는 이들과의 만남도 그들이 부러 우리를 찾아와야 가능해지니까요. 그렇기에 우리에 대한 그들의 마음이 더 잘 보인다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일까요.
그동안 영 잘못 살진 않았던지 올해도 바다를 건너 많은 이들이 찾아와주었습니다. 어떤 방문은 목 빼고 기다리던 만남이라 반가웠고 어떤 방문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등장이라 놀라웠습니다.

#11 다시, 동백제주 해녀들은 겨울에도 쉴 틈이 없다. 한겨울 차가운 바다 속으로 물질하러 들어가는 해녀들. 제주의 겨울은 뿔소라 수확철이다.
같은 경험을 가진 친구들과의 시간이 즐거운 이유는 그 시절의 우리 자신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 아닐까요. 제주까지 찾아온 그들과 함께 나는 천방지축이던 대학 신입생 시절의 캠퍼스로 가기도 했고, 마치 내일은 없다는 듯 신촌 바닥을 헤집고 다니던 20대의 거리로, 자신감과 사는 재미가 폭발했던 30대의 방송국으로, 멀리 뉴질랜드의 시골마을이나 볼리비아의 빛나는 우유니 사막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좋은 구두가 아니라, 좋은 친구가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갑니다.
문득 당신 생각이 나는군요. 이른 땅거미가 내려앉는 초저녁, 책 속에 고개를 파묻고 있다가 인기척에 눈을 들면 당신이 저기 문 앞에서 소주 두어 병 흔들며 웃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남은 술을 내 잔에 털어 넣고 '한 병 더!'를 외치면 당신은 고운 눈을 흘기며 말하겠지요.

"으이그, 술 욕심은…"
분명히 말해두건대, 술을 욕심내는 게 아니라 당신과의 시간을 욕심내는 거예요.
당신과 소주 한 잔 하고 싶은 하늘입니다. 이 저녁, 당신은 어느 하늘 아래 누구와 함께인가요. 당신의 시간을 술잔에 담아 가져가고 있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요.
당신을 좋은 곳으로 데려가는 친구들과 따뜻한 시간 보내길 바라요. 혹 나와 함께 했던 그 시간, 그 곳이 그리울까봐 나는 여기 제주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제주도 좋아하나요>
오늘도 혼자 먹나요? 어설프게 차려진 저녁을
해산물 좋아하나요? 함께 먹으러 가요.

낚싯대로 잡은 자리돔, 해녀가 갓 건져낸
멍게 한 접시 먹으러 가요.
비행기 값도 많이 내렸다던데.
오늘도 혼자 마시죠. 그대가 있다면 좋을 텐데
한라산 좋아했었죠? 함께 취했잖아요.
종일 바라보던 밤바다, 바람이 시원한
그 섬엔 아직도 내가 있어요.
마음먹으면 금세 도착할 곳에

- 재주소년 6집 중에서


송혜령 방송작가글을 쓴 송혜령은 방송작가로, 대학 졸업 후 십수 년간 TV 교양프로그램과 토크쇼ㆍ다큐멘터리 등을 만들면서 세상 사는 법을 배웠고, 독서와 여행을 통해 세상 읽는 법을 배우고 있다. 마흔 살이 되던 해 하던 일을 작파하고 주위의 부러움과 우려와 억측 속에서 남편과 함께 1년간 세계 여행을 감행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1년 만에 제주도로 이주, 동쪽 바닷가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여행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작가 블로그 | http://blog.naver.com/coolcool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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