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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마티스가 사랑한 모델
앙리 마티스가 사랑한 모델앙리 마티스, ‘대화’, 캔버스에 유채, 177×277㎝, 1911, 상트페테르부르크, 예르미타시 미술관 소장
‘야수파(野獸派, Fauvism)’의 대표 화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는 스물한 살이던 1890년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평생 근면 성실하게 작업에 매진했다. 여행을 하거나 투병 생활 중에도 붓을 놓지 않은 그는 ‘색채의 마술사’로 불릴 만큼 색채의 물질성을 강조함으로써 20세기 미술의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평탄할 것만 같던 그의 삶은 1939년 일흔 살에 ‘황혼 이혼’을 당하며 수모를 겪는다. 이혼을 당한 이유는 예쁠 것도 없는 한 러시아 모델 때문이었다. 조강지처와 모델, 작품에 남아 있는 두 여성을 중심으로 마티스의 예술 세계를 들여다본다.
앙리 마티스가 사랑한 모델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캔버스에 유채, 81×65㎝, 1905, 샌프란시스코, 개인 소장
앙리 마티스가 사랑한 모델앙리 마티스, ‘마티스 부인, 초록색 선’, 캔버스에 유채, 40.5×32.5㎝, 1905, 코펜하겐, 국립미술관 소장
앙리 마티스가 사랑한 모델앙리 마티스,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35.4×27.3㎝, 1939, 상트페테르부르크, 예르미타시 미술관 소장
모델이 된 화가의 아내100년 전만 해도 화가들이 모델을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아카데미의 전문 모델이 아닌 일반인이 화가의 캔버스 앞에서 포즈를 취하기는 쉽지 않았다. 마티스는 그만의 작품 스타일 때문에 여자 모델을 구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얼굴과 인체를 마음대로 변형하고 색채를 거침없이 구사한 탓에 선뜻 모델이 되겠다는 여성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마티스도 대부분의 화가들이 그랬듯이 아내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1889년 마티스와 결혼한 툴루즈 출신의 아멜리 파레르. 그녀는 마티스가 조형 세계를 확립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야수파의 수장 자리에 오를 수 있게 한 작품의 모델도 그녀였다. 1905년 가을 살롱전에서 가장 충격적인 작품으로 꼽힌 ‘모자를 쓴 여인’(1905)이 그것. 오른손에 부채를 든 파레르가 외출복 차림으로 앉아 있다. 머리를 묶어 올리고 화려한 장식의 근사한 모자를 쓴 모습이 단정하다. 이 작품은 전통 초상화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색채는 파격적이다. 빨강과 초록, 주홍과 파랑, 차가운 색과 따뜻한 색의 대비와 병렬이 한바탕 ‘색 잔치’를 벌이고 있다. 부부싸움 뒤에 화가 나서 아내의 얼굴에 물감을 마구 칠한 것 같기도 한 이 그림은 야수파 특유의 격렬한 터치와 난폭한 색채 사용으로 형태가 희생되었다.

당시엔 누구도 이 문제작이 지닌 혁명적인 성과를 알아보지 못했다. 비평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림의 진가를 알아보고 구매한 컬렉터가 있었다. 덕분에 마티스는 파산 직전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후 그림 가격은 마구 치솟았다. 그는 이듬해에 파레르를 모델로 초상화를 한 점 더 그린다. 역시 채색은 파격적이었다. 이 초상화의 제목은 ‘마티스 부인, 초록색 선’(1906)이다. 세 가지 색면으로 처리한 배경에,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와 정면을 응시하는 시선, 굳게 다문 입술이 당당하다. 하지만 색채는 여전히 당황스럽다. 특히 얼굴을 가로지르는 대담한 초록색이 낯설다. 배경인 초록색보다 연두색에 가까운 따뜻한 색감의 초록색 때문에 얼굴이 돌출되어 보인다. 이 그림은 색채의 순수성을 드러내되 ‘모자를 쓴 여인’과 달리 조각적일 만큼 견고한 형태 감각을 동시에 보여준다. 각각의 작품에서 실제 모델인 파레르와 그림 속 여인이 얼마나 닮았는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마티스에게 이미지를 그린다는 것은 색채를 겹쳐 쌓는다는 뜻이었다. 모델의 얼굴은 색채, 선, 면, 형태의 조화를 만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마티스는 자신이 영향을 받은 폴 세잔의 견고한 구조적 형태와 폴 고갱의 장식적인 색면을 더욱 발전시켜 형태에 묶여 있던 색채에 해방의 감격을 안겨준다. 그 결과, 보는 이에게 색과 색이 만나 섞이고 충돌하면서 연출하는 색들의 화음, 그 색들의 구조적 질서를 선사한다.
“색채에는 각기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음악에서 소리를 보존하려고 애쓰듯, 화가는 색채의 아름다움을 잃어서는 안 된다. 구성은 색채의 아름다움과 신선함을 살리는 일이다.”(마티스)

마티스는 이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 르네상스 이후 500년 동안 서양 미술을 지배해온 전통 미술의 규칙과 법칙을 파괴했다. 현실을 실감 나게 재현하기 위한 원근법과 명암법, 해부학 등을 없앰으로써 화면을 단순한 ‘색채의 향연’으로 환원시켰다. ‘저녁 식탁, 붉은 조화’(1908)에서 보듯이 주관적으로 칠해진 색은 더 이상 형태와 관계가 없다. 마티스는 자신의 감정이 원하는 대로 색채를 구사하고, 색이 원하는 대로 캔버스를 구성했다. 이 때문에 마티스는 ‘표현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표현주의는 색채에 대한 감정이입을 바탕으로, 자연을 재현하는 대신 화가의 마음대로 표현하였다.

앙리 마티스가 사랑한 모델앙리 마티스, ‘푸른 누드 4’, 구아슈를 칠한 색종이 오려 붙이기, 103×74㎝, 1952, 니스, 앙리 마티스 미술관 소장
마티스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신경이 매우 예민해져 작은 소음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파레르는 늘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작업하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하곤 했다. ‘화가의 가족’(1911)은 마티스 가족의 초상이다. 빨간 옷을 입고 체스를 두는 아들 장과 피에르,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서 있는 첫딸 마르그리트, 소파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파레르의 모습을 그렸다. 바닥에는 알록달록한 문양의 페르시아 양탄자가 깔려 있다. 벽난로와 벽, 소파에도 다양한 문양이 가득하다. 가족을 장식 속에 맞춰 넣은 것만 같다. 그렇다. 마티스에게 중요한 것은 디테일한 인물 묘사가 아니라 회화의 창조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단순성과 장식성이 공존한다. 단순성은 원근법과 명암의 제거에 따른 평면성에서, 장식성은 음악적 리듬에서 얻어졌다.

마티스는 붓을 들기 시작하면 몇 주씩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고행 중인 수도승처럼 말이다. 물론 그동안에는 가족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아 파레르는 남편의 외면 속에 성장기의 세 아이를 건사했다. 마티스는 작업 중일 때 아내가 말을 거는 것조차 싫어했다. 파레르는 ‘마닐라 숄을 걸친 마티스 부인’(1911), ‘대화’(1911), ‘피아노 수업’(1916) 등의 작품에 모델로 서면서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까닭에 진정으로 남편의 예술을 이해했음에도 그녀는 우울증을 앓았다. ‘대화’ 속 주인공은 마티스 부부다. 작업복인 파란색 줄무늬 옷을 입고 서 있는 마티스와 검은 옷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있는 파레르. 둘 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제외하면 둘 사이가 냉랭해 보인다. 일반적으로 검은색은 ‘단절’, ‘끝’, ‘폐쇄’, ‘죽음’을 의미하는데, 파레르는 마음의 문을 닫은 것 처럼 보인다. 그들의 생활에서 ‘화가의 가족’ 속 정겨운 분위기를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앙리 마티스가 사랑한 모델앙리 마티스, ‘화가의 가족’, 캔버스에 유채, 143×194㎝, 1911, 상트페테르부르크, 예르미타시 미술관 소장
앙리 마티스가 사랑한 모델앙리 마티스, ‘저녁 식탁, 붉은 조화’, 캔버스에 유채, 180×200㎝, 1908, 상트페테르부르크, 예르미타시 미술관 소장
금발의 모델과 황혼 이혼“내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정물도 풍경도 아닌, 인체다.”(마티스) 그런 만큼 마티스는 판에 박힌 포즈를 취하는 아카데미 모델을 극도로 싫어했다. 아내와 마르그리트가 주로 작품의 모델로 선 것도 그 때문이다. 마티스는 어렵사리 마음에 드는 모델을 구하면 그들과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테라스의 조라’(1912)의 모델 조라, ‘누워 있는 로레트’(1916~1917)의 주인공으로 50여 차례 모델을 선 이탈리아 여인 라우레테(프랑스식 이름은 ‘로레트’), ‘화가와 모델’(1919)의 앙투아네트 아르누, ‘파란 배경과 누운 여인’(1923) 등에 7년 동안 모델을 선 앙리에트 다리카레르, ‘치장 배경과 장식 인물’(1925)의 이탈리아 모델 치타, 반스 재단 벽화 ‘춤’의 무용수였던 리제트 등이 그랬다. 그러나 말년의 뮤즈는 마른 몸매에 밝은 금발과 파란 눈동자, 긴 코와 뾰족한 턱을 가진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1910~1998)였다.
러시아 출신인 델렉토르스카야가 마티스를 처음 만났을 때 나이는 스물 셋이었다. 소르본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그녀는 파리에서 열아홉에 결혼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이혼한 처지였다. 마티스는 대화가 잘 통하는 그녀와 좋은 말벗으로 지내면서 물심양면으로 그녀를 도왔다. 하지만 그들이 연인 관계는 아니었다. 마티스와 쌍벽을 이루는 파블로 피카소가 곧잘 모델과 사랑에 빠진 것과 달리 마티스는 모델을 깊이 관찰하면서도 결코 이성으로서의 문턱을 넘지 않았다. ‘꿈’(1935)은 침대에 엎드린 델렉토르스카야가 팔베개를 하고 잠든 모습을 그린 것이다. 단순한 구도에 분홍색 피부와 파란색 침대가 대비를 이루며, 인체의 곡선이 빚어내는 분위기가 편안하다. 비록 몸이 변형되고, 금발이 초록색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긴 코에서 그림 속 여인이 델렉토르스카야임을 알 수 있다.

마티스에게 표현이란 순간적인 묘사가 아니라 ‘오랫동안 집약된 감정’이었다. 그래서 모델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응시한 다음 실물과 상관없이 자신의 느낌에 따라 자유로이 형태를 그리고 색채를 사용했다. 무려 6개월이나 걸려 완성한 ‘분홍 누드’(1935)에서 델렉토르스카야의 실제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작품 속에는 지극히 간결하게 ‘발효’시킨 단순한 조형물로서의 인체만 남아 있다. 패턴화된 배경과 누드가 연출하는 유기적인 형태와 기하학적인 형태, 곡선과 직선, 따뜻한 색조와 차가운 색조의 조화가 완벽한 짜임를 보여준다. 마티스의 작품은 현대미술의 ‘오래된 미래’였다. 색채의 자율적 구사를 통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결국 화가가 자신, 즉 나를 표현하는 행위라는 현대미술의 개념을 그는 선구적으로 실천했다. 파레르의 눈에 델렉토르스카야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파레르는 마티스에게 델렉토르스카야를 해고하라고 통보하고, 마티스는 고민 끝에 아내의 말을 따라 모델로서 그녀를 해고한다. 하지만 이듬해에 델렉토르스카야는 개인비서 자격으로 마티스의 화실에 출근을 한다. 이를 지켜본 파레르는 감정이 폭발해 마침내 마티스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앙리 마티스가 사랑한 모델앙리 마티스, ‘꿈’, 캔버스에 유채, 81×65㎝, 1935, 파리, 퐁피두 센터 소장
앙리 마티스가 사랑한 모델앙리 마티스, ‘분홍 누드’, 캔버스에 유채, 66×92.5㎝, 1935, 볼티모어 미술관 소장
마티스가 마지막으로 그린 드로잉마티스는 1941년 십이지장암으로 수술을 받은 후 죽을 때까지 침대와 휠체어 신세를 졌다. 그러면서도 붓 대신 가위를 들고 색종이 오리기 작업을 계속했다. 스스로 ‘가위로 그린 소묘’라 이름 붙인 색종이 작품(‘푸른 누드 4’)들은 형태는 단순하면서도 색채는 강렬했다. 이는 바로 마티스가 지향한 예술 세계의 절정이었다. 이혼 후 병치레가 잦았던 마티스에게 델렉토르스카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녀는 1940년부터 모델 대신 마티스 인생의 동반자이자 관리자 역할을 했다. 마티스 작품에 대해 폭넓게 이해하고 있는 그녀는 마티스가 ‘분홍 누드’를 그릴 때 스물두 단계로 단순화해가던 작업 과정을 사진으로 찍고 꼼꼼히 기록했다. 마티스 사후에는 그에 관한 책을 두 권이나 내는 등 델렉토르스카야는 화가로서 마티스를 세상에 알리고자 최선을 다했다. 고마움의 표시였을까. 마티스가 생전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은 델렉토르스카야의 얼굴 드로잉이었다.

글 정민영(아트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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