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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살아 움직이다
미술관, 살아 움직이다
스스로 다가가지 않고 누군가 찾아와주기만을 기다리는 곳. 그래서 미술관의 시간은 늘 정지되어 있는 느낌이다. 미술관에 생명을 불어넣고, 시간을 되살리고, 그림들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숨결이고, 다른 문화 예술과의 만남이다. 마치 전국 곳곳에 있는 ‘박물관이 살아 있다’가 과거에 멈춰버린 유물에 세상의 빛과 색으로 생명력을 불어넣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처럼. 스스로 갇힌 공간을 박차고 나오고, 그림만을 고집하는 대신 사람과 역사와 예술과 만나고 소통하고 즐길 때 미술관도 ‘숨 쉬는 곳’, ‘삶이 스며든 공간’이 된다. 오로지 보여지기만을 고집하고, 그림만 품으려 하고, 사람들로부터 점점 멀어지면 아무리 뛰어난 명화를 간직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한낱 창고일 뿐이며, 외로운 ‘장식’에 불과한 것을.

꼭 예술일 이유도 없다. 음악이면 어떻고, 영화면 어떻고, 춤이면 어떤가. 역사와도 만나고 일상과도 만나는 공간. 서로 다른 느낌과 감정의 결합을 통한 시간과 공간, 느낌과 감정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이야말로 ‘박물관이 살아 있다’처럼 미술관도 ‘살아 있게’ 하고 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뮤지엄 워크아웃(The Museum Workout)’으로 그림이 에어로빅ㆍ체조와 만나고 있고, 런던 빅토리아&앨버트 미술관과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서는 그림 속으로 요가와 명상이 들어가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우리 미술관도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지난여름 과감하게 ‘국립’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던지고 전시장 문을 활짝 열어 스포츠와 영화, 음악을 맞이한 국립현대미술관. 곳곳에서 요가도 하고, 춤도 추고, 한여름 밤 야외 콘서트도 펼치고, 영화도 상영하고, 환경도 생각해본 <에코 판타지>는 공간의 확장이자 시간으로서의 확장이기도 했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미술관도 그림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고, 문화와 문화가 어울리는 삶의 체험 공간, 마음이 숨 쉬는 공간, 정신과 육체의 쉼터가 됐다. 고궁인 덕수궁도 5년 만에 다시 살아 있는 공간이 됐다. 2012년 덕수궁 프로젝트의 기억을 되살려 덕수궁 곳곳을 현대미술로 채움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 <덕수궁 야외 프로젝트: 빛ㆍ소리ㆍ풍경>에서 미술관은 더 이상 막힌 공간이 아니었다. 마당이 미술관이고 대청마루가 전시실이었다. 찾아가는 미술관이 아니라 그냥 고궁을 거닐면 역사와 예술이 빛과 소리와 풍경으로 다가왔다. 중화전 앞 행각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계ㆍ폐회식 음악감독 양방언과 가구 디자이너이자 황신혜밴드에서 활약한 장민승이 한국 근대 건물과 생활상을 슬라이드에 담은 ‘온돌야화(溫突夜話)’를 음악과 함께 들려주었고, 석조전에서는 고종 황제와 덕혜옹주가 120년의 세월을 넘어 와 4개의 시선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은 불면증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보낸 고종 황제의 심경을 이미지와 사운드로 담아 슬픈 역사를 우리 곁에 불러들였다.

미술관은 미술가들이 그림이 아닌 몸으로 쓴 역사 속으로도 기꺼이 들어갔다. 미술가들이 붓과 물감, 캔버스에 갇혀 있기를 거부했듯이 미술관도 이를 거부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어지고 있는 <역사를 몸으로 쓰다>는 때론 파격으로, 때론 격렬하게 시대와 인간, 자연을 몸으로 표현한 반세기 ‘퍼포먼스 미술’의 역사다. 전위적이고 독창적인 그들의 작품에서 몸은 곧 삶이고, 기억이고, 관계다.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닌 몸을 통해 표현하는 그들의 행위가 우리의 사회ㆍ역사ㆍ문화적 맥락과 관심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그것을 사진이나 영상에 담든, 아니면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보여주든. 1961년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독일에서 발표한,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어 헤쳐 쓴 붓글씨 ‘머리를 위한 선’도 그 역사의 한 부분이다. 존 레넌의 아내 오노 요코, 박찬욱 감독의 동생 박찬경처럼 낯익은 얼굴도 있다.

생명은 자유를 먹고 자란다. 미술도 미술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국립현대미술관은 본능으로 움직인 육체의 역사에 어떤 제약이나 해석을 하지 않고 자유로이 맡겨두었다. 그렇다고 전위적이고 파격적인 것에만 집착하지도 않았다. 일본 하이레드 센터는 ‘청소 이벤트’처럼 걷고 청소하고 먹고 요리하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몸짓도 기꺼이 살아 있는 예술로 반갑게 맞았다. 이런 친밀한 만남을 통해 미술관도 생명을 얻고 세상과 소통한다. 상념이 아닌 현실에서 인류의 공동 과제인 전쟁, 테러, 자살, 빈곤, 환경오염 등을 함께 생각하고 잃어버린 ‘나’와 공동체를 함께 돌아보는 살아 있는 공간이 된다. 보는 것을 넘어 체험하고, 함께 숨 쉬는 ‘삶의 공간’으로서 변신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미술관은 이미 우리 곁에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것이 조금 어색하고, 잠시 혼란스럽고, 이따금 불협화음을 내면 어떤가. 문화와 예술은 이렇게 새로운 경험을 통해 우리 삶으로 들어오고, 그것을 기꺼이 허락하면서 다른 세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시간을 나눌 때 미술관도 살아 있게 되는 것이니까.

미술관, 살아 움직이다

글 이대현국민대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ㆍ논설위원.
저서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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