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속 문화 탐방 HOME
검색 분류
블로그 전송 카페 전송 밴드 전송 카카오스토리 전송 페이스북전송 트위터전송
#1 센야마침표와 첫 줄 사이
마침표와 첫 줄 사이
북극의 파리라고 불리는 노르웨이 최북단 트롬쇠(Tromsø)에서 렌터카를 타고 서부 해안을 따라 센야로 향했다. 스칸디나비아의 시작과 끝이 어떤 모습인지 상상할 수 있을 거라고 노르웨이 친구가 말을 보탰다. 겨울은 북극권 작은 어촌마을에 어떤 얼굴로 도착해 있을까. 사뭇 그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마침표와 첫 줄 사이지역문화와 소수자들이 아르툴리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노르웨이해와 피오르도 아르툴리의 무대가 된다. ⓒwww.artijuli.no
수만 년 전 빙하가 조각한 협만(峽灣)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센야(Senja)는 북부와 서북부 노르웨이에서 로포텐(Lofoten)과 더불어 절경으로 손에 꼽히는 지역이다. 총면적 1,600여 ㎢로 우리나라 제주도보다 조금 작은 섬. 하지만 내륙과 매우 가까워 굳이 배를 타지않아도 다리를 통해 건너갈 수 있는데, 우리나라 강화도 정도를 떠올리면 된다.

센야의 인사오후가 훌쩍 지나 센야섬에 들어서자 서로 어깨를 맞대고 웅장하게 서 있는 피오르가 가장 먼저 반긴다. 센야는 노르웨이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지만 전반적으로는 상당한 오지처럼 느껴져 딱히 도심이나 번화가라 부를 곳이 없다. 다만 바다를 마주하고 골짜기마다 들어선 작은 마을들이 조금 멀고 또 조금 가까운 거리에서 사람의 풍경 약간을 날것의 대자연에 더하고 있었다. 마을을 빼고 또 하나 자연에 새긴 선명한 사람의 흔적이 있는데,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터널이다. 수십 개의 터널이 협곡과 협곡을 관통하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눈이 너무 많이 오면 잠시 폐쇄되기도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디든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얼마간 마을에 갇혀버리는 것. 무엇을 기대하고 오느냐에 따라 센야가 보여주는 장면은 다르겠지만, 누구라도 이 말에는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센야는 인간을 훌쩍 뛰어넘는 곳이다”

마침표와 첫 줄 사이눈싸움은 센야 사람사이에 가장 대중적인 겨울스포츠
느리고 순전한 날들을 지나우리 일행에게 집을 내준 노인에게 잠시 인사를 건넸다. “여긴 온통 고요뿐이네요. 적적하지 않으세요?” 그는 무심하게 답했다. “에고, 큰 도시 사람들이나 그렇지. 여기서야 어디 삶을 그렇게 힘줘 살 일이 있나.” 실제로 그의 일상은 단순하고 느슨했다. 오전에는 연어를 손질하고, 오후에는 집을 치우거나 산책을 한다. 보통날의 큰일이란 연어 출하나 납품, 겨울용 장작 준비, 피오르 여행자와 오로라 헌터를 위한 숙박 관리가 전부다. 삶의 가속도는 이곳에서 잠시 멈춰 있다. 그를 따라 산책을 나갔다가 긴 골짜기와 그 사이를 고요히 채운 눈, 북극에서 내려온 바람, 바람에 흔들리는 노르웨이해의 파도를 구경하다 돌아왔다. 지구 어디라도 시간은 똑같이 흐를까. 아마도 아닌 것 같다. 센야의 시간은 내가 지나온 어떤 도시, 어떤 마을보다 훨씬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해가 거의 뜨지 않는 극지의 겨울-극야(極夜)에 가까워 날은 부쩍 짧았지만 이곳 사람들이 하루를 순전하게 채우기엔 매우 충분했다.

마침표와 첫 줄 사이야외 설치를 위해 작품을 이동중이다. ⓒwww.artijuli.no
마침표와 첫 줄 사이2012 아르툴리의 Augustin Rebetez 전시 ⓒwww.artijuli.no
아주 작고 아주 긴 예술제겨울은 물론 사계절 내내 고요한 센야지만 여름이 찾아오면 작은 소란이 인다. 해가 지지 않는 백야를 맞아 무려 한 달 동안 펼쳐지는 예술제 ‘아르툴리(Artjuli)’ 때문이다. 뵈베르(Bøvær)마을의 까마귀성(Kråkeslottet)에서 개최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흔히 아는 큰 축제를 상상하면 곤란하다. 사실 까마귀성은 과거 수산물 가공공장이었던 건물을 개조한 고작 2층 규모의 문화센터다.
그러나 아주 오래되고 아주 작은 이 예술제는 노르웨이 예술가는 물론 지역 주민, 여행자 모두에게 꽤 특별한 의미가 있다. 4명 내외의 작가가 작품을 전시하고, 작은 파티와 주말 콘서트가 한달 내내 이어진다. 웅장하고 압도적인 이벤트 대신 센야에 삶을 차린 사람들과 이들을 찾아온 여행자가 예술을 매개로 작은 공동체를 이루는 아기자기한 축제. 당연한 일이겠지만 센야의 예술제는 꼭 센야에서의 삶을 닮아 있다.

마침표와 첫 줄 사이센야섬 동부 피오르 사이에 북극의 바람이 분다.
마침표와 첫 줄 사이센야 트롤뮤지엄에 있는 노르웨이 최대 트롤상 ⓒwikipedia
트롤의 고향이니까센야를 여행하는 사람 중에는 종종 트롤을 만나기 위해 왔다는 이들이 있다. 실제로 이곳에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큰 트롤이 있으며, 가끔 트롤을 정말 봤다는 믿거나 말거나 무용담도 전해진다. 우리에겐 영화 <반지의 제왕>을 통해 잘 알려진 트롤은 사실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거인족의 이름이다. 피오르 동굴에 거주하며, 보통 300년 넘게 살고, 키는 대략 3m에 몸무게는 무려 1톤에 달한다고. 원래는 거인의 세상 요툰하임(Jotunnheim)에서 살았지만, 신들에게 쫓겨 인간 세상으로 도망쳐 오며 능력 대부분을 잃었다고 한다. 우리의 도깨비, 장승 이야기처럼 트롤 신화는 센야 지역 문화와 예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트롤뮤지엄(Senjatrollet)은 그 대표적인 증거다. 센야섬 곳곳에는 트롤이 살았다는 민화가 전해지는데, 1993년 스스로 트롤의 아버지라 부르는 레이프 루바크(Leif Rubach)가 세웠다. 1997년 세계에서 가장 큰 트롤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20여 m의 트롤 모형과 트롤과 관련한 온갖 소품이 숱한 여행자를 반긴다. 트롤의 신화는 노르웨이 대자연과 물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설명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보통 트롤은 거대하고 위험하지만 다소 느리고 멍청하게 묘사되는데, 인간을 사냥하려고 밤에 동굴을 빠져 나온 트롤이 아침이 오는 줄도 모르고 사람의 마을에 머물다가 태양에 노출되는 바람에 그 자리에 굳어버려 기암괴석이나 피오르의 일부가 되었다고 한다. 트롤은 그렇게 자연을 해석하는 눈이자, 센야의 문화를 조각한 손이자, 수많은 여행자를 부르는 목소리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마침표와 첫 줄 사이피오르 여정의 동행
마침표와 첫 문장의 사이사람들은 항상 시작과 출발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무언가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약속이, 새로운 환희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작은 피오르 도시에서 반년쯤 그들의 삶을 흉내 내며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새로운 도전과 설레는 출발 전에 가만히 꾹 찍어 누른 마침표, 그 멈춤이 주는 반듯한 힘의 세기다. 삶은 한 권의 책 같아서, 새로운 장의 시작은 이전의 이야기로부터 서사를 이어받는다. 그러니 전 장의 마침표와 새 장의 첫 문장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허리를 세우고 또 한번 도전할 수 있을까. 그건 앞으로 펼쳐질 숱한 미래의 장면과 우리의 의지, 용기 같은 것에만 달려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젠가 끝마쳤던 어제의 마지막 문장 그리고 그 이후 찾아온 잠시의 멈춤에도 달려 있었다. 겨울의 센야는 잠시 마침표를 찍고, 다음 장의 첫 줄을 시작하기 전에 숨을 고르는 당신을 닮아 있다. 자연과 사람과 시간이 느리게 흐르다 때론 멈춰 선다. 깊은 호흡마다 순백이었다.

안테의 법칙스웨덴의 라곰(Lagom), 핀란드의 휘게(Hygge)처럼 센야를 비롯해 노르웨이 문화와 예술 전반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 바로 얀테의 법칙(The Law of Jante). 1933년 노르웨이 작가 악셀 산데모세(Aksel Sandemose)가 그의 소설에서 얀테라는 이름의 마을을 등장시키며 마을의 규칙을 소개한 것이 기원이다. 얀테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
마침표와 첫 줄 사이
개인의 자유와 프라이버시가 그 어느 나라보다 보장된 노르웨이지만 동시에 모두의 평등과 공동체의 질서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엿볼 수 있다. 평범을 통해 개인은 더욱 특별해진다.
➊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말 것
➋ 당신이 우리만큼 좋다고 생각하지 말 것
➌ 당신이 우리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말 것
➍ 당신이 우리보다 더 훌륭하다고 상상하지 말 것
➎ 당신이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 것
➏ 당신이 우리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말 것
➐ 당신이 모든 것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말 것
➑ 우리를 비웃지 말 것
➒ 당신을 누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지 말 것
➓ 당신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 것

글•사진 양정훈(여행작가)

댓글 보기



삭제하기
TOP
페이스북 블로그 유투브 인스타그램
검색하기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