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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좇다상도전기공업(주) 이칠상 회장
상도전기공업(주) 이칠상 회장
상도전기공업(주)는 우리나라 가전제품 역사와 그 궤를 함께해온 기업이다. 1970~1980년대 밥솥과 다리미, 990년대 전기온돌과 전기보일러, 2000년대 정수기와 비데 등 대한민국 국민의 변화하는 생활상을 반영한 제품 안에는 상도전기공업(주)의 시즈히터가 들어가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다. 국내 최초의 시즈히터 개발사로서 꼿꼿한 자부심과 열정을 그대로 간직한 상도전기공업(주). 그곳에서 여전히 든든한 주춧돌 역할을 하고 있는 이칠상 회장을 만났다.
국내 최초로 개발한 시즈히터시즈히터는 대중에게는 낯선 단어지만 전기다리미, 전기밥솥, 커피포트, 전기프라이팬, 정수기, 비데, 전기보일러, 전기오븐 등 사실 우리가 가장 가까이 두고 있는 어지간한 가전제품 안에 필수로 들어가는 부품이다. 금속 보호관에 열선과 보호관을 절연한 관 모양의 히터를 말하는데, 전기 열에너지의 효율성을 높이면서 다양한 모양으로 용도와 형태를 적합하게 가공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상도전기공업(주)는 국내 최초로 시즈히터를 개발했다. 1972년 처음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창립 46주년, 강산이 다섯 번 가까이 바뀔 동안 우리나라 가전제품의 역사와 변화, 유행을 고스란히 반영해온 기업인 것이다.
“제가 철도청에 근무할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 전용 열차의 식당차에 정비를 하러 갔는데 처음 보는 주방 기구가 있었어요. 스위치를 켜고 화구에 빨갛게 불이 들어오는 걸 본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죠. 전기과를 나온 제게 다들 ‘저게 뭐냐’고 묻더라고요. 저도 처음 봤다고 하자 ‘그것도 모르냐’며 핀잔을 주었죠. 그때 이런 것도 모르는 내가 여기에 근무할 자격이 있나, 오기가 생겼습니다.(웃음)”
몇 달간 그 일을 가슴에 품고 있던 이칠상 회장은 결국 청계천 세운상가로 향했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미 8군이 쓰다 버린 ‘그 물건’을 발견했다. ‘전기히터’라고 이름을 알려준 상인은 값을 꽤나 비싸게 불렀지만 이 회장은 고민 끝에 밥 대신 당분간 라면을 먹을 각오로 기어코 그 물건을 집으로 가져왔다.
“콘센트를 꽂으니까 벌겋게 달아오르더라고요. 내부가 궁금해서 기계를 분해했더니 파이프와 열선, 분말(절연물)이 들어 있었어요. 원리를 이해한 저는 다시 거기에 들어가는 재료를 하나하나 찾아 샘플을 만들었습니다.”

상도전기공업(주) 이칠상 회장

내 인생에 과잉 투자는 없다상도전기공업(주)는 그렇게 탄생했다. 친구 몇몇과 함께 회사를 세운 이칠상 회장은 시즈히터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지만 문제는 판로였다.
“그때 누군가가 대구 다리미 공장에 가보라고 했습니다. 찾아갔더니 다행히 관심을 보였어요. 당시 다리미는 전기운모에 열선을 감고 다리미 철판을 깔아 만들었는데 열선이 자꾸 끊어져 수명이 짧은 게 문제였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기술 특허도 갖고 있다며 열심히 영업을 했고, ‘한번 써보자’라는 말에 최초로 납품에 성공했습니다.”
시즈히터가 들어간 가전제품이 없던 그때, 새 다리미는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리고 이어서 약한 니크롬선 대신 시즈히터를 사용해 만든 전기오븐 역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상도전기공업(주)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창업 초기부터 쉬지 않고 이루어진 기술 개발은 지금도 이칠상 회장이 아들 이시영 사장에게 가장 강조하는 부분이다. 시즈히터 제조사 중 유일하게 있는 부서인 ‘공무과’도 이 회장의 철학으로 만들어졌다.
“연구 개발은 우리의 숙명이었습니다. 기술을 배울 데가 없으니 제가 직접 유럽으로 건너가 기계 박람회를 돌아보고, 제조 공장을 찾아가 직접 눈에 담고 원리를 터득해 돌아와서 공무과 직원들과 의논해 설비를 만들어 썼어요. 지금도 공장 설비의 80%는 우리가 직접 만든 것입니다. 유사 업체가 한창 생겨날 때 경쟁사에서 우리 회사 직원을 많이 빼 갔는데, 그럼에도 유효기간이 3~6개월밖에 안 됐던 이유는 우리가 설비를 계속 바꾸고 수동 기계를 자동화하면서 끊임없이 생산량과 품질을 높였기 때문입니다. 또 자체 개발 설비를 이용해 고객이 원하는 부품에 맞춰 세팅할 수 있었던 덕분에 다품종 소량 생산의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 회사만의 강점이었지요.”
사업 하는 사람들은 종종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한자 성어를 사용한다. 노력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운도 중요하다는 의미로, 상도전기공업(주) 역시 선택적 운과 치열한 노력의 중간쯤에서 큰 위기를 맞은 적이 있다.
“대량 납품을 하던 큰 업체가 부도를 낸 적이 있습니다. 다른 기업과의 일을 정리하고 그곳하고만 거래를 하는 상황에서 터진 일이었죠. 거의 1년 매출을 부도 맞아 타격이 정말 컸는데 그렇게 난감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상도전기공업(주)가 망했다고 했다. 특히 경쟁사들은 “그럴 줄 알았다”, “평생 잘나갈 줄 알았느냐”라는 말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상도전기공업(주)는 망하지 않았다.
“핵심은 제가 기업을 운영하는 동안 과잉 투자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익이 생기는 만큼만 투자하고 과욕을 부리지 않았어요. 부동산 투기가 성행하던 시절이었지만 그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았죠. 보관하고 있던 장기어음을 이용해 막았고, 일거리가 떨어지자 예전에 너무 바빠 어쩔 수 없이 거래를 거절했던 밥솥 회사에 다시 찾아가 발주를 부탁했어요. 그때 손잡은 업체가 지금의 쿠쿠전자입니다. 그걸 기반으로 우리 회사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죠.” 모두가 운이 다했다고 할 때, 그는 쌓아온 기술력과 돈 앞에 교만하지 않는 자세로 다시 일어섰다.

상도전기공업(주) 이칠상 회장

IBK기업은행 노량진지점과 함께해온 의리의 시간자기 자신과 한 약속을 올곧게 지켜온 이칠상 회장의 성정은 IBK기업은행 노량진지점에 대해서도 변함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창업 당시 집 근처에 있는 유일한 은행이었던 노량진지점과 거래를 시작한 이후 46년간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의리를 지켜왔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가 초창기에는 상도동에 있었어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다 보니 공간도 좁고 전력 수급에 문제가 생기면서 때마침 분양 중이던 반월공단에 들어가려고 했지요. 그때 도와준 곳이 IBK기업은행이었습니다. 당시 담보도 자본도 없었던 우리 회사를 오직 ‘가능성’만 보고 도와주셨죠.”그렇게 맺은 인연은 질기고 길었다. 이칠상 회장은 후취담보로 금액을 인정해주고, 중소기업이 사기에는 부담스러웠던 CSM 기계를 당시 5년 거치 10년 상환 정책 덕분에 구입할 수 있었던 기억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꺼내놓았다. 또 직원 자녀들이 IBK기업은행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는가 하면 은행에서 가입한 보험 덕분에 병원 치료비까지 지원받는 등 무수히 받은 혜택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노량진지점 장석주 지점장은 또 다른 말을 한다. “가장 오래된 우수 고객으로서 도움을 받은 건 정작 우리”라는 것이다.
“제가 작년 초에 부임한 뒤 인사를 드리러 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회장님께서 제가 24대 지점장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이칠상 회장님은 수첩에 노량진지점의 역대 지점장 이름을 빼곡히 적어 갖고 계실 정도로 우리 은행에 무한 애정을 품고 계신 분입니다. 지점을 경영하다 보면 가끔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마다하지 않으시고 도와주시니 저로서는 무어라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기업에서 은행을 이렇게까지 생각해주시기가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지요.”
장석주 지점장과 이칠상 회장이 서로에 대한 덕담과 애정을 탁구공처럼 주고받으니 이시영 사장이 옆에서 파안대소를 했다. “사실 회장님께 예전에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다른 은행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제안했다가 쫓겨날 뻔했습니다. 사람이 덜됐다고요.” 이시영 사장의 이야기에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 덩달아 박장대소를 했다.
“IBK기업은행은 기업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진 은행입니다. 기업을 중심에 놓고, 기업이 필요로 하는 걸 지원해주니 기업인으로서는 당연히 찾을 수밖에 없어요. 공장도 지어주고, 대출도 해주고, 기계 살 때 설비 자금도 대주고, 어려울 때 늘 옆에서 도와준 IBK기업은행을 두고 제가 어떻게 의리와 신의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분위기가 잠시 숙연해졌다. 앞에서는 웃어도 뒤에서는 손익계산을 하며 돌아가는 세상, 하물며 은행과 기업의 관계에서 ‘의리’와 ‘신의’를 챙긴다는 이 회장의 말에 모두가 잠시 잊고 있던 삶의 가치를 떠올린 덕분이다.
“제 꿈요?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제패의 선봉장이 될 수 있도록 그 뿌리가 되는 부품을 잘 만들어서 공급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직원들이 노후 준비를 할 수 있는 회사로 함께 가기를 바라고요.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해줘야 우리 행복이 가치 있는 거니까요.”희끗한 머리칼에는 세월이 내려 앉았지만 그 시간 안에서 삶의 지혜와 관록을 쌓아온 이칠상 회장. 그가 보여준 기업인으로서의 목표와 비전은 경제 논리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그만의 철학 안에서 더욱 가치 있게 빛나고 있었다.


글 이경희•사진 이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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