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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로 존재를 증명하는 이름, 아버지 그리고 아들
이성은 감성을 앞서지 못 한다
로버트 M. 피어시그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vs 파올로 코녜티 <여덟 개의 산>
부재로 존재를 증명하는 이름, 아버지 그리고 아들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시간의 빈곤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이런 오래된 물음은 한가한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인간의 삶이란 길어야 고작 100년, 영겁의 세월 속에 그것은 차라리 한순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더 인생의 근원적인 의미, 궁극적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
미국 작가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Robert M. Pirsig)는 인생의 가치를 찾기 위해 ‘질의 형이상학(Metaphysics of Quality)’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모터사이클 여행을 떠났다.
현대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파올로 코녜티(Paolo Cognetti)는 산이 주는 인생의 의미에 주목했다. “우리 운명이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 머리 위, 산에 있다”라고 여겼다.

피어시그가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장경렬 옮김, 문학과지성사)이라는 여행자 소설을 통해 인간과 세상의 가치에 대해 탐구한다면, 코녜티는 <여덟 개의 산>(최정윤 옮김, 현대문학)이라는 보다 보편적인 소재의 자연 소설을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고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한다. 두 소설은 각각 모터사이클 여행과 산행을 매개로 전개되는 아버지와 아들의 미묘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며 인생의 의미를 묻는다. 사유하는 삶을 위한 인생 독본이요, 철학 오디세이로 읽힌다.
피어시그는 자전적 요소가 강한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정신 병력이 있는 아버지와 아들 크리스의 특별한 여정을 그린다. 작가는 실제로 심각한 우울증을 앓아 정신병원에서 전기 충격 치료까지 받았고, 그의 아들도 열한 살의 나이에 정신병 진단을 받았다. 이들은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몬태나주 보즈먼을 거쳐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 이르는 17일 간의 여행을 떠난다. 평원을 달리며 바람 소리를 듣고, 부들풀 더미에 숨은 야생 오리를 관찰하며 자연을 즐긴다. 그러나 여행에서 중요한 ‘대화’는 없다. 각자 생각에 잠겨 ‘같이 또 따로’ 움직인다.
이 소설은 제목과 달리 선불교를 다룬 이야기도, 모터사이클의 기계적 성능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그것을 통해 인생에 대한 철학적인 의문을 제시하고 얼마간의 명상을 요구할 뿐이다. 작가가 선에 대해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산 채로 땅속에 파묻히는 힌두교의 수행 방법은 좀 다르지만, 선 수행의 주된 방법인 ‘그냥 앉아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권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모든 권태로움의 한가운데에 선불교의 가르침이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왠지 피상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 소설이 쉽게 읽히는 대신 그만큼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이러한 모호한 성격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화자인 아버지의 이름은 드러나 있지 않지만 피어시그 자신임이 분명하다. 작가의 또 다른 자아인 소설 속 화자에 붙은 이름이 파이드로스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수사학 교사인 소피스트를 연상시키는 이름 아닌가. 소피스트는 궤변가로 알려져 있지만 언제나 겉만 번드르르한 ‘가짜 철학’만을 늘어놓은 것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이 소설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탐구, 즉 질의 형이상학에 다시 한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재로 존재를 증명하는 이름, 아버지 그리고 아들
작가가 그토록 강조하는 ‘질’이란 무엇인가. 그는 한 인터뷰에서 역동적인 질과 정적인 질을 구분하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역동적인 질이 없이 유기체는 성장할 수 없다. 하지만 정적인 질이 없으면 유기체는 지속될 수 없다.” 여전히 모호하다. 질은 이 소설에서 파이드로스가 말하듯 아레테(aretê)라는 용어로 대체할 수 있다. 아레테는 그리스어로 탁월성 또는 도덕적 미덕을 의미한다. 파이드로스가 질 혹은 아레테에 대한 탐구를 통해 깨달은 것은 ‘진짜 철학’으로 군림하는 변증법이 억압하고 왜곡시킨 수사학의 가치다. 파이드로스는 진리가 상대적인 것이라고 믿는, 패배한 소피스트들의 생각이 곧 자신의 생각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마침내 소피스트를 증오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머리를 감싸던 후광은 사라졌다고 선언한다.

파이드로스는 ‘이성이라는 유령’에 대해 “추한 것은 바로 이성 자체였고, 이를 피해 빠져나갈 길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성을 증오하기보다는 그것의 합리적인 운용을 강조하는 편이다.
인간의 이성은 과학 발전과 기술 문명의 진보를 가져왔지만 그에 못지않은 상실감도 안겨줬다. 자연을 지배하며 풍요로운 ‘과학의 제국’을 건설했지만 한편으로는 세계의 일부가 되는 ‘이해의 제국’을 희생시킨 것이다. 번다한 세속을 떠나 호반에서의 평온한 일상을 기록한 초월주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가지고 다니는 소설 속 화자가 “당신이 무언가를 얻게 되면 반드시 무언가를 잃게 된다”라는 소로의 말을 인용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말 없는 갈등 속에 여행을 지속하는 소설 속 아버지와 아들은 무엇을 얻었을까. 힘겨운 여정에 육체의 안락은 잃었지만 이들은 ‘화해’라는 정신의 승리를 얻었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보여주는 작가의 필치는 소박하지만 강렬하다. 크리스는 묻고 아버지는 대답한다. “아빠, 정말로 정신이상이었어요?”, “아니!”, “아닌 줄 알았어요.” 크리스의 생기 있는 말 한마디에 과거를 잃어버린 아버지는 비로소 마음의 빗장이 열린다. 그는 이제 과거의 자신인 파이드로스와 하나가 되고 버성기던 아들과도 하나가 됐다. 화해의 탄생은 거창하지 않다. 전율처럼 다가온 우연한 말 한마디에 시시하게, 장난스레, 그러나 기적처럼 스치듯 이뤄지는 게 화해다.
1974년 이 소설이 나오고 5년 뒤 피어시그의 아들 크리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피어시그는 소설 후기에 참척의 슬픔을 피어린 문장으로 토해냈다.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하늘 저편 구름 위에서 황금의 하프를 연주하고 있는 것일까. 어디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 부재(不在)는 존재(存在)를 증명한다고 했던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부재로 존재를 증명하는 이름, 아버지 그리고 아들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과 <여덟 개의 산>을 한자리에서 이야기한다고 해서 굳이 이것저것 비교해가며 읽을 필요는 없다. 작가가 다른 만큼 작품의 결도 다르다. 그러나 자전적 성격이 강한 두 소설은 숨겨놓은 ‘부성애 코드’가 더없이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똑같다.
<여덟 개의 산>은 성장 소설로도 가족 소설로도 읽힌다. 산을 좋아하는, 아니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아버지 때문에 도시가 아닌 이탈리아 알프스 몬테로사 산기슭 마을에 살게 된 피에트로는 그곳에서 운명과도 같은 친구 브루노를 만난다. 이들은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내며 우정을 쌓는다. 산은 사람마다 각각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법. 피에트로의 아버지에게 산은 정복의 대상이다. 그는 언제나 누군가와 무언가와 경쟁하듯 전투적으로 산에 오른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면 이내 허탈감에 빠진다. 아버지를 따라 산에 오르는 게 버거운 피에트로가 성인이 되면서 산을 멀리한다. 산과의 이별은 부자에게 상처로 남는다. 그러던 중 화해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피에트로의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산을 다시 찾게 된 피에트로는 브루노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가 남긴 땅에 새집을 짓는다.
개심(改心)이고 해야 할까, 회심(回心)이라고 해야 할까. 피에트로는 집을 짓는 동안 아버지가 즐겨 찾던 산봉우리를 오르며 자신이 아버지를 빼닮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운전 중 날씨를 확인하기 위해 핸들에 두 손을 얹어놓고 관자놀이를 그 위에 대다가 흠칫 놀란 적도 있다. 아버지가 하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물려받은 것은 땅만이 아니었다. 산에 대한 열정, 암벽과 눈 그리고 소나무를 즐기는 방식까지 모두 아버지의 유산이다. 스스로를 다그치며 “숨통을 조이며 사는 법”밖에 모르던 우직한 아버지를 그는 이제 알았다.

책 제목으로 쓰인 ‘여덟 개의 산’은 불교적 세계관에 따른 우주의 중심 메루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을 말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가는 묻는다. “여덟 개의 산을 돌아본 사람이 많은 것을 깨달을까요? 아니면 메루산 정상에 올라본 사람이 더 그럴까요?”
참선을 위한 화두와도 같은 이 질문에 정답은 없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홀로 세상을 떠돈 도시 소년 피에트로의 삶도 한 곳에 뿌리내린 시골 소년 브루노의 삶도 다 의미가 있다. 메루산 정상에 오르는 삶도 주변의 연산을 에둘러 가는 삶도 소중하기는 마찬가지다. 모두 인생의 길이다. “아버지를 따라 산을 타던 것을 그만둔 지 한참이 지나서야, 어떤 인생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산이 존재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깨달았다. 나와 그의 인생에서 정중앙에 있는 산, 우리의 인생이 시작된 처음으로는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가장 높은 첫 번째 산에서 친구를 잃은 우리 같은 사람은, 단지 여덟 개의 산을 배회할 뿐이다.”
우리는 산에서 인생을 배운다. 산은 스승이다.

부재로 존재를 증명하는 이름, 아버지 그리고 아들
진리는 우리 곁에 있다. 하지만 진리가 문을 두드려도 우리는 그것을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 아니 깨닫지 못하도록 길들여져 있는지도 모른다. 피어시그의 작품에서도 코녜티의 작품에서도 아버지는 늘 그곳에 그렇게 한결같은 모습으로 있지만 아들은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선 이야기가 나왔으니 인간의 불성을 소에 비유한 심우도(尋牛圖)를 한번 떠올려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자기 곁에 있지만 보지 못하는 소, 다시 말해 자신의 본성, 그것을 발견하고 깨닫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진리를 향한 발걸음을 멈춰서는 안 된다. 여기 펼쳐놓은 두 소설은 그런 서늘한 각성을 안겨준다. ‘성찰의 문학’이 더욱 많이 나와야 한다.


글 김종면(콘텐츠랩 씨큐브 수석연구원·전 서울신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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