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HOME
검색 분류
블로그 전송 카페 전송 밴드 전송 카카오스토리 전송 페이스북전송 트위터전송
아포리즘 문학에서 ‘인간’을 본다
제바스티안 브란트 <바보배> vs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 <잠언과 성찰-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511>
아포리즘 문학에서 ‘인간’을 본다
깊은 진리를 간결하게 표현한 말이나 글을 아포리즘(aphorism)이라고 한다. 금언, 격언, 잠언, 경구 따위를 일컫는다. 그것은 평범하게 들리지만 그 안에 진리가 들어 있는 만큼 음미할수록 인생의 본질, 존재의 심연에 가닿게 하는 힘이 있다. 우리가 ‘지혜의 문학’을 찾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아포리즘은 힘이 세다. 세월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
“범절도 명예도 간 곳 없네. 그거 말일세. 아비 노릇이 글러먹어서 그런 거라네. 아내는 남편이 하는 본을 따르고, 아들내미는 아비가 하는 모양을 따르고, 딸내미는 어미와 판박이가 되는 법일세. 그러니 세상에 바보들이 흔해빠져도 이상하게 볼 것 하나도 없네. 게는 부모 게를 따라 게걸음을 걷고, 늑대 배 속에서 아기 양이 나올 리없다네.”

15세기 독일 법학자 제바스티안 브란트가 쓴 <바보배 Das Narrenschiff>(노성두 옮김, 펴냄)라는 책에는 올바른 부모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1494년에 나온 책이니 지금부터 500여 년 전 이야기다. 그런데 마치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재벌가 부모 자식의 천박한 갑질 행태를 겨냥한 듯 핍진하게 다가온다. 풍자는 힘이 세다.

중세 말기 최대 걸작이자 르네상스 최초의 베스트셀러로 평가받는 <바보배>는 괴테의 <파우스트>와 함께 독일어로 쓰인 가장 의미있는 책 가운데 하나로 꼽히지만 국내에서는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동시대와 후대 인문주의적 글쓰기의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한 이 책은 ‘우인(愚人) 문학’의 원조다. 네덜란드 인문학자 에라스뮈스는 <우신예찬>을 쓰면서 <바보배>를 모범으로 삼았다. 그런가 하면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 문학의 대표 작가 라블레는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 등장하는 바보들의 유형을 이 책에서 빌려왔다. 중세 세계상을 가장 잘 보여준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보스는 ‘바보배’라는 작품을 남겼다.

이 책의 배경인 서양 중세는 일반적으로 암흑의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세 사람들의 삶의 속내를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이와 달리 매우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시대임을 알 수 있다. 교회의 타락, 마녀사냥, 흑사병, 십자군전쟁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중세의 대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중세라는 거대한 존재를 밑에서부터 떠받친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민중의 일상일 것이다. 중세 사람들은 속박에서 자유롭지 않은 시대를 살았지만 그들의 일상적 삶은 여느 시대와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으로 점철돼 있다.

<바보배>는 중세 말의 무질서와 혼란을 경계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쓰였지만, 딱딱한 도덕교과서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훈계조가 아니라 웃음기 섞인 경쾌한 필치로 써 내려가 부담 없이 읽힌다. 자연을 직접 보고 그린 사생화를 감상하는 느낌이다. 각 텍스트에는 풍자의 내용을 압축한 목판화가 딸려 있어 이해를 돕는다. 저자는 이를 ‘바보거울’이라고 부른다.

아포리즘 문학에서 ‘인간’을 본다
이 책에는 온갖 행색의 바보가 등장한다. 후려치기에 이골이 난 장사치, 돈만 쥐여주면 무엇이든 찍어내는 인쇄업자, 진실을 외면하며 돈벌이에 혈안이 된 성직자 등 신분과 직종도 다양하다. 이들은 항해를 떠난다. 바보깃발을 든 박식한 바보로 등장하는 저자는 이 어리석은 자들을 모두 끌어모아 바보배에 태운다. 배가 향하는 곳은 바보들의 천국 ‘나라고니아’다. 그들의 낙원행은 어떤 모습일까. 깨달음은 늘 뒤늦게 찾아오는 법. 무지와 죄악의 승선권을 쥐고 배에 올라탄 바보들은 배가 침몰하고 죽음이 임박해서야 비로소 세상의 속된 가치가 모두 부질없음을 알게 된다. 인생을 항해에 빗대는 전통은 유구하다. 그리스 신화에는 유명한 오디세우스의 항해가 나온다. 라틴문학에서도 항해의 비유는 무수하다. 중세 기독교 교부들은 교회를 공동체가 탄 큰 배로 보았다. 그러나 어리석음의 풍랑을 헤치고 나라고니아를 향해 떠나는 바보배만큼 인간 존재의 근원적 의미를 묻는 비유는 흔치 않아 보인다.

이 책에 소개된 바보의 유형은 100가지가 넘는다. 중세 기독교의 7대 죄악인 교만, 탐욕, 탐식, 음란, 시기, 분노, 나태뿐 아니라 허영, 수다, 경솔함, 도박, 심지어 유행을 좇는 행위까지도 바보로 분류해 비판의 도마에 오른다. 이를 위해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유베날리스, 플루타르코스 등 고대 작가의 작품과 성서의 잠언·시편등 교훈시가 되고 격언시가 될 만한 문구가 총동원된다. 요컨대 바보배는 아포리즘의 보고다. 인생의 자양이 될 경구와 금언이 넘쳐난다. ‘지혜의 문학’인 것이다.

저자가 구사하는 비유가 시대를 뛰어넘어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은 지금 우리의 구체적 현실과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딱따구리 비유가 눈길을 끈다. “딱따구리는 혀 때문에 제 둥지와 새들의 위치를 드러내지. 무릇 침묵 속에 옳은 답이 들어 있으니, 멋모르고 떠벌리는 자는 화를 입게 되리라.” 아무리 사납고 포악하다 해도 길들이지 못할 짐승이 없건만, 인간은 어찌 제 혀를 다스리지 못해 분란을 자초하는가. 저자가 지금 우리 곁에 있다면 바보배에 오른 이들에게 그랬듯, 이 땅의 막말 정치꾼들에게도 바보방울이 달린 바보고깔을 씌워줬을 법하다. <바보배>에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현란한 수사가 넘쳐난다. 저자도 지적하듯 바보는 길 없는 곳에서 길을 찾고 새 둥지를 탐내다가 사다리도 없이 곤두박질치곤 한다. 바보고깔을 쓰지 않기 위해서는 때를 놓치고 허송세월해서는 안 된다. 여기 지혜의 서(書)가 있다.

아포리즘의 관점에서 17세기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의 <잠언과 성찰-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511>(강주헌 옮김, 나무생각 펴냄)도 눈여겨볼 만하다.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배>가 인간의 어리석음을 마음껏 조롱하고 풍자한 인생독본이라면, 이 책은 인간이 어떻게 세상 풍파를 헤쳐 나갈 것인가 하는 처세술에 방점을 찍는 실용서라고 할 수 있다.

아포리즘 문학에서 ‘인간’을 본다
라로슈푸코는 파스칼, 라브뤼예르 등과 함께 근세 프랑스를 대표하는 수필가이자 군인, 모럴리스트다. 그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군인으로 공훈을 세워 정치의 길에도 나섰지만 염증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와 사색과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 인생의 허무를 깨닫고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익명으로 펴낸 책이 바로 1665년 출간된 이 잠언집이다. 정치적 좌절뿐 아니라 실명 지경에 이르고 아들을 잃는 등 심각한 실존의 위기를 겪은 만큼 그의 글에 염세적 기운이 감도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라로슈푸코는 글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의 미덕은 대개의 경우 위장된 악덕에 불과하다”라는 냉소적 화두를 던진다. 인간의 덕행도 결국 이기심을 감춘 행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미덕이라 일컬어지는 관용은 허영심 때문에 때로는 게으르기 때문에 행해진다. 또한 두려움 때문에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대개 이 세 가지가 복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화내지 않는 관대함의 정신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바보배>의 저자 브란트가 전하는 말은 사뭇 결이 다르다. “나귀 옆구리에 연신 박차를 가하다가 나귀가 미끄러트리기라도 하면 큰코다친다네. 참을 인(忍) 자 세 번이면 바보를 면한다네”, “현자는 언제고 평정심을 잃지 않지만, 화 잘 내는 사람은 제멋에 겨워 나귀를 타고 간다네!” 나귀는 어리석음의 상징이다. 두 작가가 시야는 다르지만 관용의 미덕을 적극 평가하는 점은 같다.

라로슈푸코가 전하는 잠언과 성찰에는 이 시대의 도덕률과 어울리지 않는 것도 적지 않다. 반(反)여성주의적 시각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여자라도 학문을 사랑할 수는 있다. 하지만 모든 학문이 여자에게 적합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아무 학문에나 여자가 몰두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며 십중팔구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그는 젠더 감수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전근대적 인간인가. 이 같은 극단적 여성관은 애욕의 노예가 돼 정신적·육체적으로 피폐한 삶을 산 그의 개인사와 무관치 않다. 17세기 절대 왕정이 반석에 오른 이른바 ‘프랑스 황금시대’의 정신사적 풍경을 엿볼 수 있다.

라로슈푸코는 우리 신세는 시시포스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시시포스는 험한 길을 따라 바위를 힘겹게 끌어 올리지만 바위는 속절없이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결코 정상에 다다를 수 없다. 마침내 꿈을 가질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그는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라고 말한다. 그가 전하는 잠언과 성찰에는 이 시대의 도덕률과 어울리지 않는 것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인생의 극한을 경험한 자의 내면이 담긴 글이니만큼 거짓의 흔적이 묻어나지는 않는다. 인생의 정면교사, 때로는 반면교사로 충분히 참고할 만하다.

인생은 항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라로슈푸코가 말하듯 가장 행복한 항해의 순간도 온갖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바보고깔을 쓰고 바보배에 오르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려면 자기 안에 지혜의 나무를 키워가는 수밖에 없다.


글 김종면(콘텐츠랩 씨큐브 수석연구원·전 서울신문 수석논설위원)

댓글 보기



삭제하기
TOP
페이스북 블로그 유투브 인스타그램
검색하기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