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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영혼의 모험, 그 두렵고 낯선 길에 ‘인생’이 있다
알렉상드르 뒤마 <삼총사> vs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자유와 영혼의 모험, 그 두렵고 낯선 길에 ‘인생’이 있다
레바논 태생의 예언자이자 시인 칼릴 지브란은 “내 영혼아! 삶은 새벽을 향해 밤을 달리는 준마와 같나니, 질주하면 질주할수록 새벽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라고 노래했다. 그렇다. 고난과 시련의 밤을 쉼 없이 내달리면 마침내 희망의 새벽은 오는 법. 그러나 준마의 기상을 갖춘 삶을 살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주위에서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말도 듣기 어려워졌다 .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그 넓고 큰 원기는 다 어디로 갔는가.
하루하루 부대끼며 살아가기 바쁜 현대인에게 삶의 기개를 말하는 것은 ‘사치’로 비칠지 모른다. 그러나 살아지는 대로 사는 삶, 산다는 것의 의미조차 잊고 사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일 수는 없다. 용기, 담력, 적극성, 진취성…. 오늘날 우리는 이런 역동적인 삶의 덕목을 많이 잃어버렸다. 영어에 ‘검션(gumption)’이라는 단어가 있다. 옛 스코틀랜드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현대인의 잃어버린 삶의 풍미’ 같은 것을 뜻한다. 혼곤한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 그것은 필경 치열한 삶일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문학 작품을 통해 질풍노도와도 같은 격정적 삶을 산 인물들과 만난다. 그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랑과 우정, 애국적 열정으로 똘똘 뭉친 다르타냥과 삼총사가 그렇고, 영원한 ‘대자유인’ 그리스인 조르바가 그렇다. 가치주도적(value-driven) 삶을 살아간 이들의 자유로운 영혼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민음사)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열린책들)는 우리에게 삶의 활력을 안겨 주고, 생명의 약동을 느끼게 한다. 전자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의 흥미로운 ‘역사 모험소설’이라면, 후자는 만만찮은 사유의 힘을 요구하는 사뭇 난해한 ‘철학소설’이다. 하지만 <그리스인 조르바>는 읽을수록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지루하지 않다. 미국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가장 위대한 업적은 ‘왜’라는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에서 탄생한다. 마음속 어린아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이는 영화 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독서 활동, 특히 소설 읽기의 기본 동인은 호기심이다.
<삼총사>는 가스코뉴 출신의 젊은 시골 귀족 다르타냥이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를 호위하는 근위대 총사(銃士)가 되기 위해 파리로 떠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쇠사슬 갑옷도 넓적다리 가리개도 없이 비루먹은 노란 조랑말을 타고 가는 다르타냥의 모습은 영락없이 ‘제2의 돈키호테’다. 다르타냥의 아버지는 길 떠나는 아들에게 가문의 이름에 걸맞은 처신을 강조하며 몇 마디 충고의 말을 던진다. “추기경 예하와 국왕 폐하의 명령 외에는 어떠한 것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로지 용기만이 필요할 뿐이다. 한순간이라도 두려움에 몸을 떠는 사람은 모처럼 찾아온 행운을 놓쳐버리고 말 것이다. 너는 젊다.”, “싸움을 두려워하지 말고 스스로 모험을 찾아라. 결투가 금지되어 있기에 감히 싸우려면 두 배의 용기가 필요하다.”
<삼총사>는 ‘공정왕(公正王)’ 루이 13세의 아버지 앙리 4세에 의해 종교전쟁이 종식되고 절대왕정의 초석이 마련된 후 루이 14세에 의해 절대왕정이 확립될 때까지의 시대가 배경이다. 루이 13세 당시는 추기경의 내정 권한이 워낙 강해 백성들이 국왕보다 추기경을 더 무서워했다. 하늘에 두개의 태양이 떠 있는 셈이었다. 그런 현실이 <삼총사>라는 스릴 넘치는 모험 서사의 토양이 됐다.
다르타냥은 삼총사로 알려진 아토스, 포르토스, 아라미스를 만나 ‘음모의 시대’를 헤쳐 나간다. 이들은 걸핏하면 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그것은 늘 정의의 이름에 값하는 것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도덕적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자유와 영혼의 모험, 그 두렵고 낯선 길에 ‘인생’이 있다
<삼총사>를 진지한 본격문학(본래적인 예술을 위한 문학) 작품으로 보기보다는 다분히 권선징악적인 뻔한 내용의 익살스러운 이야기쯤으로 보려는 이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삼총사>에는 간결한 문체만큼이나 명쾌한 정서적 울림이 있다. 총사(銃士·총을 쏘는 근위 병사)는 명예의 상징이다. 다르타냥이 꿈에서라도 총사가 되고 싶어하는 것도 그 도저한 명예를 실현하기 위해서다. 젊은 다르타냥이 존경받는 것은 명예를 중시하는 그의 삶의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언제나 솔직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린아이같이 천진난만하며, 늘 너그럽고 약자를 보호하는 태도, 그리고 변치 않는 신뢰는 진정한 귀족적 삶의 자세 바로 그것이다. 삼총사와 다르타냥이 마치 도원결의를 한 의형제처럼 언제라도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것은 이런 ‘귀족 정신’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환영>이라는 영화로 잘 알려진 프랑스 감독 장 르누아르는 ‘삼총사’의 세계를 ‘나의 명예’와 ‘타자의 명예’가 다 같이 존중받는 세계로 규정했다. 다르타냥과 삼총사의 세계를 압축해 보여주는 모토가 있다. 다르타냥이 삼총사와 자신을 포함한 ‘사총사’가 함께 추구할 정신으로 내세운 ‘하나를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하나’라는 것이다. 다르타냥은 네 배가 된 하나의 힘, 그것은 아르키메데스가 찾던 지렛대처럼 지구라도 들어 올릴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런 믿음과 신뢰의 관계가 루이 13세와 추기경 리슐리에 사이에서 핍박받는 왕비 안 도트리슈를 곤경에서 구해내는 원동력이 됐다.
<삼총사>는 낙천적인 성격의 주인공들이 펼치는 호쾌한 언동이 시종 웃음을 자아낸다. 대단원은 자못 비장하다. 추기경과 화해한 다르타냥은 총사대 부관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삼총사는 그의 곁을 떠난다. 아토스는 시골로 가고, 포
르토스는 결혼하며, 아라미스는 사제가 된다. 다르타냥은 ‘정신적 고아’다. 그래도 굳세다. 이 비범한 존재들은 또 어떤 모험을 준비할까.
뒤마는 탄생 200주년인 2002년 국가의 위인들이 묻힌 프랑스 파리 팡테옹에 이장되며 빅토르 위고, 앙드레 말로 같은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스스로 <삼총사>를 자신의 최고 작품으로 꼽았다. 뒤마는 삼총사와 다르타냥의 뒤를 잇는 다섯 번째 총사였던 셈이다.

자유와 영혼의 모험, 그 두렵고 낯선 길에 ‘인생’이 있다
다르타냥과 삼총사가 나름의 도덕률을 지키며 세속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속 조르바는 세속적이면서도 초월적인 가치를 좇으며 영혼과의 고투를 벌였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조르바처럼 문제적 인물도 흔치 않다.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로 불리는 카잔차키스는 실존 인물이기도 한 조르바를 통해 특유의 ‘투쟁적 인간상’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조르바의 분방한 삶은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나’의 이성 지향적 삶과 대비돼 한층 선명하게 부각된다. 대자대비(大慈大悲)에 이른 ‘최후의 인간’ 붓다를 동경해 마지않던 ‘나’는 “인간은 짐승이다!”를 외치는 ‘최초의 인간’ 조르바를 만나면서 그동안 자신이 들여다보지 못한 삶의 일면과 접한다. 그것은 원초적이고 야생적이다. 때로는 일탈의 모습을 띠기도 한다. 질그릇을 만들기 위해 물레를 돌려야 하는데 새끼손가락이 걸리적거린다고 도끼로 잘라버린 조르바. 그는 깨달음을 춤으로 표현할 때는 지구의 중력이 무색하게 몸이 가벼워짐을 느끼기도 한다.
조르바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충실하다. 답답하면 바닷물에 뛰어들고, 외로우면 사랑을 하고, 실컷 울고 웃고 춤추며 산투르를 연주하는 그에게는 샤먼과도 같은 영적인 기운이 감돈다. 조르바는 마음 가는 대로 산다. 하지만 생각 없이 막 사는 것은 아니다. 그는 세상의 속담을 살짝 비틀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새장의 배부른 참새가 되느니 연못의 비쩍 마른 물닭이 되겠다.”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차라리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말 아닌가. 조르바가 욕망하는 것은 영혼의 해방이다. 그는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뻘 속에 갇혀 있어서 무디고 둔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것을 끄집어내려고 그토록 애면글면하는 것이다.

자유와 영혼의 모험, 그 두렵고 낯선 길에 ‘인생’이 있다
조르바는 인위적인 문명에 압도돼 스스로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들에게 구원의 빛은 ‘야만’에 있다고 온몸으로 절규한다. 허위와 싸우기 위해 지독한 냉소를 투사하는가 하면, 위선과 싸우기 위해 섬뜩한 위악을 동원하기도 한다. 세상사 모든 것이 그러하듯, 관습의 굴레에서 벗어나 낯선 길을 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많은 이가 이미 밟아 다져진 쉬운 길을 걷는다. 그러나 불완전한 이성의 노예로 살고 싶지 않다면 조르바처럼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트레일 블레이저(trail blazer)’가 돼 무한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 자전적 소설에서 조르바를 통해 구체화된 절대 자유에의 의지는 곧 카잔차키스의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자신의 묘비명을 생전에 미리 준비해두
었다고 한다. 자유혼의 화신이다. 그의 자유사상은 이념과 종교, 국가에 갇혀 있던 당대 유럽인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카잔차키스는 조국 그리스가 터키와의 전쟁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민족주의를 버렸다. 그러고는 공산주의적 행동주의와 불교적 체념의 조화를 모색했다. 그 결실 가운데 하나가 <붓다>라는 희곡 작품이다. 카잔차키스는 붓다와 정신적으로 조우할 즈음 이렇게 썼다. “붓다의 ‘자비’를 통해 우리는 육체의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육체에서 해방되어 결국은 모든 것과 하나가 된다”. 인식의 주체인 나와 인식의 객체인 세계를 하나로 아울러 절대 자유를 누리고자하는 불교의 사상은 그의 영혼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완성하는 데 크나큰 자양분이 됐다.
낯선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두려워한 조르바는 영혼의 자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극단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작가가 궁극적 목표로 삼은 것은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우주적 합일로 보인다. 소설의 주인공 조르바와 또 다른 주인공 ‘나’가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통해 ‘위대한 인간’과 ‘각성한 인간’으로 나란히 탄생하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카잔차키스의 삶 자체가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경험과 관념 등 극적인 개념으로부터 조화를 이끌어내려는 투쟁으로 이뤄져 있다.

다르타냥과 조르바. 이 범상치 않은 주인공들의 영혼을 향한 모험은 지금, 여기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진풍경이다. 그들은 스스로 선택한 가치를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밀고 나갔다. 그들의 우정은 남달랐고, 사랑은 헌신적이었으며, 자유를 향한 열정은 뜨거웠다. 그런 소중한 가치들이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다르타냥과 조르바처럼 도덕적 확신에 차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는 ‘극화적(劇化的)’ 인물에 눈길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글 김종면(콘텐츠랩 씨큐브 수석연구원·전 서울신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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