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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반 고흐와 고갱의 유토피아> vs 알렉산드르 푸시킨 <보리스 고두노프/모차르트와 살리에리>‘동반자’의 삶, 그 불온한 욕망의 이중주
‘동반자’의 삶, 그 불온한 욕망의 이중주
거룩한 신의 사랑은 혹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범박하게 말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죽음을 맹세한 사랑도, 우정도, 한순간 먼지가 되어 날아가 버린다. 그것이 꼭 인간의 이기심 때문일까.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손이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아갈 방도가 없다. 그러니 늘 긴장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종교철학자 마틴 부버는 인간 본질의 측면에서 ‘나와 너’의 관계에 주목했다. 그는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 대신 ‘나와 그것’이라는 비인격적 관계를 맺는 데서 인간소외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봤다. 소외를 강요하는 현대사회에서 함께 짝을 이루는 동반(同伴)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된다는 게 쉬운 일인가. 진정한 ‘동반자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역사적 인물의 삶을 한 자락만 들춰봐도 금방 알 수 있다.

19세기 후기 인상파의 두 거장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은 그 극명한 예다. <반 고흐와 고갱의 유토피아>(이택광 지음, 아트북스 펴냄)는 고흐와 고갱이라는 두 작가의 굴곡진 동반자적 삶의 여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이 책에는 인상파 화가들이 완성한 모더니즘의 바깥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두 화가의 삶의 궤적이 소상히 드러나 있다. 핵심은 고흐와 고갱이 1888년 10월부터 12월까지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아를에서 함께한 생활이다. 미술사상 가장 유명한 이 9주간의 짧은 ‘동거’는 결국 파국으로 막을 내렸지만 이 시기를 되돌아보는 것은 적잖은 의미를 지닌다. 개성을 달리하는 두 작가는 ‘옐로 하우스’라는 한 공간에서 인상주의를 극복할 대안을 고민하고 미학적 혁신을 꿈꾸며 새로운 미술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고흐에게 아를은 파리의 속물주의를 벗어날 ‘원시의 공간’이었다. 아를에서 고갱과 함께 생활하는 ‘화가 공동체’를 꿈꾼 고흐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걸작으로 꼽히는 ‘해바라기’ 연작을 비롯해 2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고갱의 사정은 달랐다. 생활고와 불안한 미래에 쫓겨 아를에 올 수밖에 없었던 고갱은 그곳 생활을 일종의 ‘계약’으로 여겼다. 일찍이 세계를 떠돈, 주식 중개인 출신의 ‘약삭빠른 파리지앵’ 고갱에게 아를은 ‘또 다른 프랑스’일 뿐이었다. 결국 고갱은 더 강렬한 원시적 생명의 근원을 찾아 남태평양 타히티섬으로 떠난다.

동상이몽에서 출발한 두 작가의 아를 생활은 진작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 이들은 우울증을 앓았다. 고흐는 애초에 광부들을 위한 목사가 되려 했지만 목사 일을 하기에 그의 영혼은 너무 불안했다. 그에게 그림은 흔들리는 영혼을 붙잡기 위해 택한 마지막 정박지였다. 고갱 또한 방황하는 영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메테 소피 가트라는 덴마크 여인과 결혼해 아이까지 뒀지만 그런 ‘정상적’ 삶이 위무가 되지는 못했다. 파리에서도 브르타뉴에서도 아를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폴리네시아 군도로 떠난 고갱. 그는 길 떠나는 자, 곧 ‘호모 비아토르’였다.

두 작가 사이에서 일어난 가장 극적인 사건은 단연 고흐가 자학에 빠져 귓불을 자른 일이다. 이 사건은 증인도 없고 진술도 허술해 진상을 알기 어렵다. 어느 미술사학자는 둘이 싸우던 중에 위협을 느낀 고갱이 펜싱용 칼을 던져 고흐의 귀를 다치게 했다고 주장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고갱에 대해 강박적 집착을 보인 고흐는 고갱이 아를을 떠난 것을 비난하며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그가 아를을 떠난 것은 마치 이집트에서 파리로 돌아온 키 작은 나폴레옹처럼 어려운 입장에 있는 자기 부하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내용이다. 측은지심마저 느끼게 한다.

이들은 예술적 열정을 공유했지만 ‘안목’을 달리했고, 경제적 이해도 달랐다. 자존감의 문제 또한 커 보인다. 고흐에 대한 고갱의 감정이 악화된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고갱은 자기 작품이 파리에서 활동하는 에드가 드가 등 미술계 주요 인사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곁에 있는 고흐는 자기 작품에 대해 말이 많고 독선적이라는 것이다.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고갱 또한 고흐처럼 비판에 민감했다. 파리에서 닳고 닳은 고갱의 눈에 고흐는 마냥 고지식한 인물로 비쳤을 법하다. 고갱은 자신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는 영혼의 동반자를 필요로 했다.

고흐는 고갱을 처음 만났을 때 그림을 팔지 못해 노심초사하는 고갱을 구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고갱은 자신을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고흐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예술관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타히티의 원시성을 화폭에 담으려 한 ‘고귀한 야만인’ 고갱과 자연에서 영성을 찾으려 한 ‘해바라기 화가’ 고흐의 예술 세계는 어쩌면 서로 이해하기도 이해받기도 어려운 것이었는지 모른다. 고흐의 말대로 “종교는 사라지지만 신은 남는다”. 예술가는 사라지지만 작품은 남아 지금도 창공의 별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신의 사랑을 받은 악동’ 요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더 이상 비밀일 것도 없는 그의 삶은 여전히 호기심의 원천이 되고 인구에 회자된다. 그 어떤 역사적 인물보다도 그의 삶이 극적이고 캐릭터 또한 독특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반자’의 삶, 그 불온한 욕망의 이중주
고흐를 얘기할 때 으레 고갱을 말하듯, 모차르트 얘기에는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따라붙는다. 맥락은 물론 다르다. 고흐와 고갱 혹은 고갱과 고흐는 여러모로 서로 어금버금한 경쟁자요, 동반자였다. 그러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동반자라기보다는 그저 ‘선후배’ 사이로 보는 게 옳을 듯하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보다 여섯 살이 많다. 단편적이나마 이 두 음악가 삶의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주목할 만한 게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희곡집 <보리스 고두노프/모차르트와 살리에리>(조주관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펴냄)다. 모데스트 무소륵스키의 오페라로도 잘 알려진 <보리스 고두노프>와 함께 실린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2장의 짤막한 작품으로 ‘작은 비극’이라 불린다.

푸시킨의 예술관이 압축돼 있는 이 작품은 모차르트의 죽음에 대한 전설을 기초로 쓰였다. 푸시킨은 근거 없이 떠도는 ‘모차르트 독살설’을 토대로 이 작품을 썼지만, 독살설은 사실과 거리가 먼 꾸며낸 이야기라는 게 정설이다. 어린 시절부터 류머티즘으로 인한 열 때문에 심장이 약했던 모차르트는 1791년 심장 충격에 따른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모차르트의 천재적 음악성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 푸시킨은 “<돈 조반니>에 야유를 퍼부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작품의 막이 오르면 살리에리의 독백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천상에 정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에도 정의는 없다. 나에게 그건 단순한 음계처럼 명백한 것이다.” 신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고 믿는 살리에리에게 남겨진 일은 스스로 장인이 돼 예술가로서의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다. 그의 노력은 절규와도 같은 독백에서 드러나듯 눈물겨운 것이었다. 살리에리는 쓸모없는 오락을 멀리하고 음악에만 몰두했다. 음악을 시체처럼 해부하고 화음을 수학적으로 분석했다. 잠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2~3일 동안 골방에 홀로 앉아 있다가 환희를 맛보고는 작품을 불태워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살리에리가 창조한 선율은 신의 영역에는 가닿을 수 없는, 인간의 기교로 가득 찬 소리에 불과했다. 모차르트가 등장하기 전까지 당대 최고의 궁정 음악가로 더없는 영광과 기쁨을 누린 살리에리였다. 그러나 그는 이제 자조에 빠져 스스로 영혼을 갉아먹는 신세가 됐다. “사람들에게 짓밟혀 목숨이 붙은 채로 모래와 먼지를 핥는 뱀”처럼 천한 질투심에 사로잡힌 존재가 됐다. 살리에리의 인간적 고뇌조차 푸시킨의 ‘질투의 심리학’에서는 ‘위선’으로 간주된다. 푸시킨은 살리에리를 질투와 야욕에 불타는 괴물로 그렸다.

푸시킨은 모차르트의 음악을 ‘신의 소리(Vox Dei)’로, 살리에리의 음악을 ‘인간의 소리(Vox populi)’로 규정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와 달리 한순간의 영감으로 ‘천상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천재 음악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장인 정신의 총화’라 할 살리에리의 작품은 이미 우수한 것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영감이냐, 장인 정신이냐’는 예술사의 오랜 화두다. 그것은 예술 사조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시인이나 음악가가 추앙받은 낭만주의 시대에는 예술가의 영감이 강조된 반면, 산문 작가 등이 존경받은 사실주의 시대에는 막연한 영감보다 확실한 장인 정신이 중시됐다. 상징주의 시대에는 다시 영감이 각광받았다. 그러나 상징주의에 반기를 든 오시프 만델시탐 같은 러시아 시인은 “살아 있는 시의 창조자는 이상주의적 몽상가 모차르트가 아니라 엄격하고 강직한 장인 살리에리”라며 살리에리에 대해 호감을 보이기도 했다. 푸시킨은 천재적 영감에 따른 ‘신의 소리’에 무한 신뢰를 보내는, 다분히 극단적 예술관을 피력하고 있지만 그것 또한 일면적 고찰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푸시킨이 이 작품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 예술만이 위대하다는 사실이다. 예술과 인간성을 따로 보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전체로 본 것이다. 창조적 재능과 인간성은 같이 간다. 이 같은 사실은 ‘천재와 악행은 양립할 수 없다’라는 모차르트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은 모차르트가 제멋대로이고 교만하다고 쑥덕거렸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삶을 사랑하고 농담을 즐긴 유쾌한 천재였다. 천재는 소박하고 명랑하며 정직하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모차르트는 재산 관리같이 잇속 차리는 데는 서툴렀지만 아이와 놀아주는 것 같은 사소한 일에는 관심을 뒀다. 반면에 살리에리는 의식적이며 부자연스러운 성격의 소유였다. 살리에리는 자신의 표현대로 “심오할 정도로 고통스럽게” 모차르트를 질투했다. 경박한 천재에게 창조적 영감을 내려준 ‘천상의 실수’를 증오했다. 살리에리의 불행이 탄생한 지점이다.

고흐와 고갱,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이야기는 주인공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대립이 발생하고 결국 파탄에 이른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성격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은 ‘성격’이다. 성격의 동반 없이 함께하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서로 짝을 이뤄 입길에 오르내리는 이들 예술가의 삶이 그 증좌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또 무엇인가.


글 김종면(콘텐츠랩 씨큐브 수석연구원·전 서울신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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