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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또 하나의 작가’다
번역가, ‘또 하나의 작가’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말했다. “시란 번역하면 사라지는 것”이라고. 어디 시뿐인가. 글이든 말이든 원래의 느낌과 감정, 그곳에 스민 영혼의 숨결까지 오롯이 다른 언어로 담아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몇 개월 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의 오역이 화제가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바벨탑이 무너진 이후 서로 다른 말과 글을 사용하는 인간에게 ‘소통’으로써 번역은 필연이다. 특히 그 모습과 언어가 어떻든 인간의 다양한 삶을 담고, 나아가 나와 다른 인간을 이해하고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문학에서는.
번역은 ‘제2의 창작’프로스트의 말은 뒤집으면 문학에서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역설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번역은 단순히 다른 언어로 바꾸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시나 소설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문학성을 지닌 작품이라도 그 나라의 언어적 감성과 감각으로 되살리지 못하면 시와 소설은 낯설고 향기 없는 ‘이물질’이 되고 만다. 문학에서 번역을 ‘제2의 창작’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2년 전, 소설 <채식주의자>를 번역해 작가 한강과 공동으로 인터내셔널 부문 맨부커상을 받은 데보라 스미스는 “번역은 시인의 작업과 비슷하다”라고 말했다. “문학작품을 번역한다면, 그 자체로 훌륭한 작품이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작품의 ‘리듬’을 찾으려 노력했고, 한 문장을 번역하는 데 스무 가지 가능성을 놓고 고민했다. 그 섬세한 번역에 작가도, 심사위원단도 “매 순간 아름다움과 공포가 묘하게 섞인 작품과 잘 어울린다”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평가 못지않게 그녀가 ‘영어를 아주 잘하는 한국인’이 아닌 ‘한국 문학의 매력에 빠진 영국인’이라는 사실이다. 더구나 불과 6년 전 문학 번역가를 꿈꾸며 한국어를 독학한 28세(당시)의 젊은 여성이다. 만약 번역을 데보라 스미스가 아닌 한국인에게 맡겼다면 영국인들이 작품의 맛과 멋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을까. 이렇게 <채식주의자>는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여겨온 ‘외국어를 잘하는 한국인의 번역’에 의문을 던졌다.

번역가, ‘또 하나의 작가’다
번역, 누가 해야 하나외국 소설의 국내 출판을 보면 그 의문은 당연하다. 일본 소설을 국내에 출판할 때 누가 번역하는가. 한국어를 잘하는 일본인인가, 일본어를 잘하는 한국인인가. 소설이든, 영화든 번역은 원작의 언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번역되는 언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문학의 외국어 번역 출판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좋은 번역은 좋은 작품이 있어야 하고, 작가 못지않은 문학성과 언어 능력, 창의성과 열정을 가진 번역자가 있어야 하고, 그들에 대한 지원과 애정이 뒤따라야 한다.
이제 한국문학을 번역하는 외국어 번역가도 외국 문학을 번역하는 한국어 번역가만큼이나 많아졌다.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바로는 33개 언어권 837명이다. 그러나 실제 꾸준히 전문 번역 작업을 이어가는 사람은 4분의
1도 안 된다. 몇 달 공들여 작품 한 편 번역해야 고작 몇백만 원밖에 받지 못하는 경제적 여건 때문이다. 그나마 80% 이상이 6개 주요 외국어(영어,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 독일어, 스페인어)에 몰려 있고, 그중 외국인은 극소수이다.
한국문학의 외국어 번역판도 국제 도서전의 한 코너를 거뜬히 메울 만큼 많다. 그러나 아직도 ‘우수하다’라고 자신할 만한 번역은 20%에 불과하다고 한다. 문학적 감수성이 떨어지는 딱딱한 직역, 아니면 단어의 뜻조차 엉뚱하게 바꾸거나, 그 나라의 문화와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번역으로 오히려 작품을 망쳐놓기도 한다. 한국어를 알고, 한국문학에 관심이 있고, 문학적 감각까지 지닌 데보라 스미스 같은 번역가를 더 많이 찾고 길러야 하는 이유이다. 이른바 ‘3세대 번역가’들이다. 그 나라 언어로 작품의 맛과 멋을 고스란히 살려낼 수 있는 실력과 젊은 감각을 가진 모국어 번역가야말로 한국문학, 나아가 한국문화를 세계와 연결하는 중요한 동반자이자 작가이다.

새로운 가능성, ‘3세대 번역가’외국어에 능통한 한국인, ‘1세대 번역가’인 이들은 주로 외국 문학을 국내에 번역하는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한국문학의 외국어 번역도 이들이 맡았다. 그러다 점점 한국어에 능통한 외국인 연구자들(2세대 번역가)이 나타나면서 한국문학의 번역도 ‘세계화’를 맞았다. 그리고 지금은 데보라 스미스로 대표되는 ‘3세대 번역가’ 시대를 맞았다. 2010년부터 비록 수는 적지만 한국문학을 전공한 전문 원어민 번역가인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골라 문학적 감수성은 물론 언어의 뉘앙스까지 전달하기 위해 고민하고 연구하는, 역량 있는 젊은 번역가들이다.
지난해만 해도 스페인의 알바로 트리고 말도나도와 러시아의 류드밀라 미해에스쿠가 권여선의 <삼인행>을, 독일의 빈센트 크러이셀, 중국의 리우 중보, 일본의 다케우치 마리코가 조해진의 <사물과의 작별>을 각자의 모국어로 소개해 한국문학번역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한류’ 열풍에 힘입어 한국문학의 매력에 빠져 지금도 3세대 번역가를 꿈꾸는 젊은 외국 문학도들이 열정을 바쳐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며, 한국을 찾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한국문학의 또 하나의 미래이다.
번역가, ‘또 하나의 작가’다
글 이대현국민대학교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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