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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로키산맥(ROCKY MOUNTAINS)생각 너머 생각의 숲
생각 너머 생각의 숲
만년설 위로 햇살이 부서지는 모습이 너무 눈부셔 캐나다 중서부의 선주민(先住民)은 로키(Rocky)를 ‘빛을 내뿜는 산’이라 불렀다. 빼곡히 나무를 채우고, 수만 년간 녹아내린 빙하의 호수를 숨겨온 땅. 그 한가운데 사람의 길이 나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생각 너머 생각의 숲
생각 너머 생각의 숲생각 너머 생각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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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 빙하가 녹아 이룬 옥빛 루이즈 호수(Lake Louise).
02 ― 루이즈 호수의 전경을 감상하는 부부.

콜롬비아 빙하가 녹아 이룬 옥빛 루이즈 호수(Lake Louise). 수면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동안 저 멀리에 관광객 몇 명이 띄운 카약이 물살을 밀며 지난다. 은퇴 후 첫 단체 여행을 떠나왔다는 캐나다 동부 노인들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고성 호텔 정원에 나란히 앉아 호수 위에 드리운 태양과 숲의 춤을 보고 있다. 숱한 여행자가 한여름의 얼음 계곡을 찾아, 수십만 평 침엽수림의 겨울 날숨을 찾아, 때로는 잠시 고된 삶의 정지(停止)를 찾아 이곳에 들고 난다. 그 과정에 인간과 자연 사이 부침이 있었고, 편견과 오해가 있었다. 그 너머 귀한 약속과 약속의 파기도 있었다. 과거의 장면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생각 너머 생각의 숲03 ― 밴프 국립공원의 모레인 호수에서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
빛으로 시작된 산창밖으로 보이는 전나무들이 족히 10m는 넘게 자라 있어 자꾸 하늘을 가린다. 캐나다 서부 해안에서 출발, 전체 로키산맥 중 앨버타(Alberta)주에 속한 지형을 일주일 남짓 살펴보고 돌아오는 여정이 중간을 지나고 있다. 종종 캐나다 중서부에 위치한 산악 지형 정도로 오해받기도 하는 로키는 북부 유콘(Yukon)주를 시작으로 남쪽 국경을 훌쩍 넘어 미국을 지나 멕시코까지 이어지는 총길이 4,500km의 장대한 산맥이다. 한반도 북쪽 끝에서 최남단까지 거리의 네 배가 넘으니 얼마나 압도적인 크기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산봉우리들이 워낙 길게 뻗어 있어 짧은 여행을 통해서는 전체 산맥 중 극히 일부만을 볼 수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재스퍼 국립공원(Jasper National Park), 밴프 국립공원(Banff National Park) 등 북미에서 명성이 자자한 곳이 이 지대에 속해 있다. 로키 내에서도 국립공원이 특별한 이유는 그 안에 품은 다양한 생명 때문이다. 산양, 산염소, 올빼미, 다람쥐 등이 가장 먼저 보이고, 산이 깊어지면 엘크나 무스 등의 거대 사슴과 살쾡이를 마주치기도 한다. 종종 흑곰이나 회색곰 혹은 멸종 위기종인 카리부를 만났다는 여행자들의 믿거나 말거나 한 무용담도 전해진다. 물론 로키가 품어낸 생명에는 사람이 빠질 수 없다.


생각 너머 생각의 숲04 ― 모랜츠 커브를 통과하는 기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찻길이라 불린다.
로키와 인간 사이 첫 길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오기 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던 선주민들은 로키산맥을 ‘빛의 산’이라 칭했다. 흰 바위산이 많아 그랬다는 설과 해발 수천m에 이르는 고산의 만년설 봉우리 때문이라는 설이 함께 전해온다. 이곳에 오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지만, 워낙 산세가 험하다 보니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온 선주민이라고 해도 쉽게 산 위에 삶을 뿌리내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멀리 평원에서 로키의 산맥을 경외하고 설산의 신을 읽으며 조심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 의해 선주민과 로키의 관계는 중대한 변화를 맞이한다. 신대륙의 발견이라는 미명(美名)을 내걸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온(물론 선주민 역사에서는 이것을 침략으로 명시한다) 유럽인과의 충돌 속에서 선주민들은 점점 로키 깊숙한 곳으로 터전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조금씩 늘며 로키를 넘는 길이 닦였다. 이후 이 지역은 문명의 발전에 따라 대전환기를 맞게 되는데, 바로 철도의 개설이었다. 19세기 중·후반 연방의 맥도널드 수상은 캐나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잇는
횡단철도를 놓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그로부터 15년 뒤, 마침내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열차가 로키를 관통하며 인간과 로키 사이에 본격적인 사랑과 전쟁이 시작됐다.

생각 너머 생각의 숲05 ― 도로가 잘 닦여 있어 로키를 바이크로 횡단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사랑과 전쟁함께 여행을 떠났던 어머니는 로키 산장에서 맞이하는 밤마다 이런 대자연을 곁에 두고 사는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인간과 로키 사이 첫 길이 열린 이후 캐나다 사람들은 이 놀라운 산과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 평원에서 볼 수 없던 다양하고 새로운 동식물이 눈에 띄었고, 탐험이 시작되며 쉽게 믿기 힘든 빛깔의 호수를 발견했다. 끝을 알 수 없는 장엄한 빙하의 계곡이 열렸다.
땅을 팔 때마다 귀한 자원이 쏟아져 나오고 온천이 발견되며 사람들은 로키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나무를 베어도 줄지 않는 숲은 마치 산업 시대의 영광을 위해 준비된 신의 선물 같았을까.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시선에서 인간의 방식으로 써 내려간 서사다. 이 시기는 로키의 입장에선 전쟁이 시작된 때라고 보는 게 맞다. 인간 수명의 몇 배를 살아낸 고목은 힘없이 베어져 나갔고, 도로가 깔리고 차들이 밀고 들어오며 사슴이 죽어 나갔다. 눈과 비와 태양과 바람까지 번갈아 유구한 세월 다져온 땅은 허무하게 파헤쳐졌다. 사람들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로키 역사의 전부라면 지금의 풍경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연은 항상 인간을 위해 무엇이든 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착각, 자원 개발이 언제까지나 지속 가능하리라는 오만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원래 인간은 편리를 좇기 마련이어서, 더 편리한 관광 인프라가 깔릴수록 더 많은 관광객이 찾아들고, 더 좋은 미래를 약속할 수 있을 거라는 편견의 반대편을 읽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 너머 생각의 숲06 ― 로키산맥을 따라 북부에서 남부로 여행 중인 바이크 여행자들.
편리의 편견을 부수는 사람들사실 로키를 여행하는 동안 여행자가 어려움을 느끼는 지점은 많지 않다. 관광버스는 주요 관광지 바로 앞까지 사람들을 데려가고, 케이블카는 높은 산맥 정상으로 쉽고 안전하게 인도한다. 도로는 잘 닦여 있고 숙소는 쾌적하다. 그러나 좀 더 로키에 익숙해지면 곧 작은 불편이 보이기 시작한다. 분명 유명 관광지라는데 그럴싸한 식당가나 상점 하나 보이지 않는다든지, 통신 전파가 잡히지 않아 휴대전화가 빈번하게 무용지물이 된다든지 하는 일들 말이다.
그날도 안테나가 뜨지 않아 이 방향 저 방향으로 휴대전화를 하늘 높이 들어보고 있는데, 지역 가이드가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겠다며 말을 꺼냈다. 왜 그렇게 전파가 안 터지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산세가 험해서 그렇지 않겠냐고 답했다. 그는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 불통인 거 같지 않느냐 되묻는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한 일인 것도 같다. 캐나다가 통신 후진국도 아니고, 기지국 몇 개만 세워도 괜찮을 텐데 말이다. 이미 개설된 도로 중심으로 설치하면 개발에 따른 자연 훼손도 최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 가이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로키 지역에 벌이 많이 살고 있고, 이들의 생식과 작업은 로키의 숲과 대자연을 순환시키는 중요한 열쇠란다. 그런데 통신 전파가 바로 이 벌의 활동을 교란하고 위축시키는 것. 그게 진짜 이유였다. 사람들은 기지국 설치 대신 불편을 선택했다.

생각 너머 생각의 숲07 ― 콜롬비아 빙하로 여행자를 실어 나르는 설상차.
계속되는 질문의 숲바로 이들이 무분별한 개발을 경고한 사람들이다. 로키에 대한 오만과 착각을 지적한 이들이다. 사슴 보호 표지판을 도로마다 세우도록 정부를 압박하고, 산맥 곳곳을 국립공원으로 제정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다. 좀 더 편리하게 지역을 개발하면 더 많은 발전이 이루어질 거라는 말. 달콤한 유혹의 건너편을 살펴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을 훌쩍 건넌 바로 그 힘으로 지금의 로키는 존재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글의 결론은 이솝 우화나 전래 동화 속 해피엔딩이 아니다. 앨버타 로키 지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마을 밴프, 자연박물관에서 일하는 직원은 내게 동부의 산림지역이 무분별한 개발로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는 비교적 최근의 신문 보도를 꺼내 보였다. 2000년 이후 이 지역에서 손실된 산림 면적은 전체의 7%가 훌쩍 넘었다. 또 있다. 밴프와 재스퍼 지역 등지에서 너무 많은 관광객 때문에 멸종 위기 동식물이 위협받고 있다는 발표를 지역 대학이 내놓았다. 석유 및 천연가스 개발로 국립공원이 위협받는다는 비판 보도도 있었다.
개발과 보호 사이, 자연과 인간 사이, 생각과 생각 사이를 로키와 지역 사람들은 오늘도 지나고 있다. 인간은 앞으로도 수많은 문제 앞에 어떤 가치가 우선인가에 질문을 두고 로키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또 분명한 건, 숱한 오해와 착각과 편견 건너편에 그걸 부수고 깨뜨리는 사람들이 숲의 목소리를 더욱 높이리라는 점이다.



글 양정훈(여행작가)•사진 양정훈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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