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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을 넘어 황홀경의 경험‘스탕달 신드롬’
‘스탕달 신드롬’
작품 앞에서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황홀감에 빠진 경험이 있는가. 그림뿐만 아니라 조각상이나 건축을 보고, 소설을 읽고, 연극이나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누군가의 노래를 듣고, 풍경을 마주했을 때 격한 흥분과 감정의 떨림으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거나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희열. ‘스탕달 신드롬’이다.
이탈리아 심리학자 그라지엘라 마제리니가 이름 붙였지만, 스탕달 신드롬은 유래가 그렇듯 집단적 질환이나 장애가 아니다. 어떤 것을 좋아하는 현상이 전염병처럼 사람들 사이에 급속히 퍼져 나가는 것도 아니다. 예술과 인간 사이 일종의 교류다. 그 때문에 대상도, 느낌도 저마다 다르다.
이 신드롬의 모델인 소설 <적과 흑>을 쓴 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그 느낌을 “아름다움의 절정에 빠져 있다가 천상의 희열을 맛보는 경지, 모든 것이 살아 일어나듯이 내 영혼에 말을 건넸다”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심장이 마구 뛰고, 걷는 동안 쓰러질 것 같았다”라고 했다. 그는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크로체 성당에서 화가 귀도 레니의 1599년 작품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을 보고 처음 이런 감정을 느꼈다(달리 주장하는 이도 있다).

자신을 겁탈해온 아버지를 죽인 죄로 16세 나이에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베아트리체 첸치. 스탕달은 처형 직전 그녀의 모습에서 무엇을 봤을까. 그것이 <신곡>을 쓴 단테마저 경탄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에 숨어 있는 처연함인지, 연민인지, 공포인지, 체념인지, 참담하고 가혹한 운명에 대한 원망인지, 간절한 구원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짧고 불행한 삶을 산 소녀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그림에서 그는 말 못할 고통과 연민을 느꼈는지 모른다. 아니면 순간적으로 멈춰버린 베아트리체의 침묵의 언어를 들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스탕달은 그림 속에서 생생히 살아 있는 존재와 기억과 감정으로 베아트리체를 만났다. 귀도 레니가 그림에 무엇을 담고 싶었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얼마나 잘 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명작은 보는 사람, 느끼는 사람의 몫이다. 그러고 보면 ‘스탕달 신드롬’ 역시 각자의 것이다. 저마다의 삶과 경험, 정서와 감각으로 불현듯 솟아난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든···. 예술은 죽은 역사가 아닌 살아 있는 감정이다.

스탕달 신드롬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 정신적 결함이 있는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눈물과 감동으로 감각과 자각을 일깨우기도 한다. 때론 이상행동을 하기도 한다. 영화 <스탕달 신드롬>(1996)에서 브뤼겔이 그린 작품 ‘이카루스의 추락’을 보고 갑자기 쓰러진 후 그 충격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강력반 여형사나 <양들의 침묵>으로 유명한 토머스 해리슨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스탕달 신드롬 역시 자신의 것이다.
스탕달 신드롬의 본질은 감동과 일체감일 것이다. 각자 인간이 가진 부조리하지만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공감 능력이다. 예술 작품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도 그런 이유다. “왜 우느냐”고 물으면 그 대답 또한 모호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팔이 없는 승리의 여신상을 보고 “생각보다 키가 너무 커서 울었다”는 식의 종잡을 수 없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림과 눈물>의 저자인 미술사학자 제임스 엘킨스는 “이런 비논리적이고 부조리하고 신빙성 없는 설명보다 더 경이롭고 불가해한 것은 없다”면서 그 눈물은 ‘벼락’을 맞는 것과 같다고 했다. 비록 순간일망정 살면서 충분히 한 번쯤 받아들일 만하다. 이미 자신도 모르게 경험했는지 모른다. 나도 그랬으니까.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30년 전에 본 호세 조반니 감독의 <암흑가의 두 사람>(1973)에서 역시 베아트리체처럼 단두대로 끌려가기 직전 지노(알랭 들롱 분)의 모습. 마치 관객을 향해, 세상을 향해 던지는 듯한 원망과 분노, 애절함과 공포의 눈빛이 스크린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눈빛이 준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무어라 형언할 길이 없는 감정,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느낌. 그 눈빛에 많은 사람이 ‘벼락’을 맞았고, 그 충격은 프랑스에서 단두대를 사라지게 했으며, 나아가 사형 제도까지 무너뜨렸다.
이 영화가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에서 모티브를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부르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영감을 주어 새로운 예술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도 그랬다. 그리고 때로는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꼭 유명한 그림을 찾아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갈 필요는 없다. 가을이면 우리 곁을 찾아오는 크고 작은 전시와 공연,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처럼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 무심코 손에 잡은 소설, 해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찾는 수많은 영화의 어느 한 장면에서도 얼마든지 감동의 ‘벼락’을 맞을 수 있다. 그것을 보고, 느끼고, 받아들일 맑은 눈과 열린 가슴만 있으면. 스탕달만이 특별한 존재는 아니다. 그리고 스탕달이 맨 처음도 아니다.

‘스탕달 신드롬’
글 이대현국민대학교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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