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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시애틀(SEATTLE)실패의 연설과 백년의 이름
실패의 연설과 백년의 이름
바람과 숲과 어린 여우를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고 싶었던 추장 세알트. 결국 그는 실패했다.
땅은 헐값에 매각됐고, 이제 더 이상 대지의 벗도, 동지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적은 그를 기리기 위해 새 도시에 그의 이름을 붙였으니.

실패의 연설과 백년의 이름01 ― 태평양을 면한 시애틀의 풍경.
네 번째 방문이다. 지난 15년이 무색하게 시애틀은 큰 변화 없이 그대로인 듯하다. 물론, 대표적인 랜드마크 스페이스 니들(Space Needle)은 리모델링되었고, 노르딕 박물관(Nordic Museum)이나 치훌리 가든 앤 글래스(Chihuly Garden and Glass) 같은 새로운 명소가 생겼다. 그러나 파이크 플레이스 시장(Pike Place Market)에서 꽃을 파는 노인들의 깊은 얼굴을 들여다보거나, 47년째 같은 자리에서 영업 중인 스타벅스 매장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잠시 시간의 거대한 흐름을 비켜 산책하는 기분이다.

실패의 연설과 백년의 이름02 ― 시애틀에 위치한 스타벅스 1호점. 여전히 영업 중이다.
03 ― 크고 작은 카페가 문을 열며 커피의 도시라는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04 ― 시애틀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파이크 플레이스 퍼블릭 마켓 간판.

시애틀의 첫 인사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를 꼽는 설문조사에 빠짐없이 이름을 올리는 북서부의 최대 도시. 끝을 모르고 펼쳐진 태평양을 품고, 일찍부터 무역이 발달해 미국의 관문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스타벅스가 최초로 비즈니스를 시작한 도시답게 다양하고 실험적인 카페가 쉼 없이 문을 열고 닫으며 커피의 도시라는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편안하고 따뜻한 삶의 균형을 의미하는 덴마크의 라이프스타일 ‘휘게(Hygge)’를 적극 재해석하며 미국 스타일의 휘게 문화를 이끌고 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시애틀은 엄청난 매력을 가진 도시가 틀림없다. 시애틀 앞에 붙은 다양한 수식어는 여행자의 가슴을 스멀스멀 간질이기 충분하다. 하지만 여행 경험이 많은 사람이 시애틀에 첫발을 디딜 때 공통적으로 내뱉는 말은 오히려 “생각보다 심심한 도시네”일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기대를 너무 많이 했군!’ 하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다.

실패의 연설과 백년의 이름05 ― 콜롬비아 센터 스카이 뷰 전망대에서 바라본 석양.
느리게 드러나는 도시우선 날씨부터 짚어보자. 단순히 숫자만 보면 연중 기온이 비교적 균일하고, 한여름 기온은 20℃ 안팎, 겨울은 아무리 깊어도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거의 없는, 말 그대로 온화하기 그지없는 도시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좀 사정이 다르다. 여름을 제외하면 1년 내내 온전히 맑은 날이 드문(연중 구름 낀 날이 300일 안팎이다) 일조량이 부족한 도시이고, 늦가을부터 봄까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오락가락 비가 내린다.
또 있다. 사실 시애틀은 이제 고작 백오십 살이 조금 넘은 젊디젊은 도시다. 물론 미국의 역사 자체가 짧은 편이지만, 뉴욕 등 다른 대도시와 비교해도 상대적으로 늦은 1850년대 초에야 북미 이주민의 정착이 본격화됐다. 이 말은 곧 시간을 켜켜이 쌓아 올린 유적지나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 등 문화유산이 빈약하다는 의미다. 북미 이주민이 들어오기 이전에 선주민(先住民) 역사가 있지만 서울, 로마, 파리, 런던 등 유서 깊은 도시와 견주기에는(적어도 문화유산의 규모 면에서는) 조금 모자란다.
하지만 첫인상의 실망은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시애틀은 압도적이고 강렬하게 인사하는 도시가 아니다. 대신 조금 심심하고 담백하게 말을 건네고,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수록 깊어지는 도시다. 내 경험에 비추면, 도시는 언제나 여행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오후의 차를 좋아하고, 일과 휴식 사이의 균형을 귀하게 여기며, 대놓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은은하게 빛나는 조명을 반기는 사람이라면 시애틀은 충분히 달고 다정하다.

실패의 연설과 백년의 이름06, 07 ― 시애틀은 화려하기보다는 다정하고 따뜻하게 다가오는 도시다.
레이니어 설산의 민족콜롬비아 센터 스카이 뷰 전망대(Columbia Center Sky View Observatory)에 올랐다. 시애틀 도시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명소로는 제일 먼저 스페이스 니들을 떠올리지만, 사실 콜롬비아 전망대에 올라야 좀 더 높은 곳에서 조망할 수 있다. 지상에서 300m 높이로, 공식적으로 태평양 북서부를 통틀어 가장 높은 층. 파노라마 창밖으로 시애틀의 다운타운과 태평양에 노을이 가득 쏟아지고, 전망대 카페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은 연인들은 속삭임마다 사랑을 뱉어낸다.
그리고 가장 먼 풍경. 도심을 훌쩍 넘어 들판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그 끝에 닿는 아찔한 설산, 해발 4,392m의 레이니어(Mount Rainier)가 있다. 고르고 낮은 지평선 한가운데 산 하나가 거짓말처럼 솟아올라 흡사 합성 사진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도시에서 한눈에 보이는 산이라고 만만히 여겨서는 안 된다. 자그마치 백두산의 두 배 가까운 높이다. 바로 저 산 기슭에 시애틀 이전 시대의 끝이며, 시애틀의 시작이고, 실패이며 동시에 성공이었던 선주민 스콰미시(Squamish)족이 살았다. 성스러운 물의 사람들이자 바람의 어머니라고 불린 민족.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관광을 넘어 여행 인문학 깊은 곳으로의 문을 여는 중요한 열쇠다.

실패의 연설과 백년의 이름08 ― 아름다운 유리공예의 정수를 보여주는 치훌리 가든 앤 글래스.
실패한 추장의 슬픈 연설앞서 시애틀의 시작이라고 언급한 1850년대 초는 정확히 유럽에서 북미 대륙으로 이주해온 이주민, 즉 백인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들 이전에 시기를 가늠할 수 없는 오랜 시간 이 땅에 터를 잡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스콰미시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은 미국이 건국되고 백인들의 정착이 본격화되며 한 번도 예상하지 못한 난국(難局)을 맞이한다. 민족의 대지를 통째로 정부에 매각하도록 강요받은 것. 말이 매매지 실은 헐값에 땅을 넘기라는 협박이었다.
권모술수와 박해가 끊이지 않았다. 당시 스콰미시족의 추장(酋長) 세알트(Sealth)는 결국 민족을 지키기 위해 땅을 팔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매각 협상에서 그는 “도대체 어떻게 이 바람과 대지를 팔라는 말입니까? 땅과 하늘과 바다의 주인은 우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자연을 빌려 사는 이들이며, 꽃과 나무와 대지가 오직 우리의 주인입니다”라며 간곡히 말했지만 결국 땅은 매각되고, 이주민이 밀려오고, 낯선 도시가 세워졌다.
수탈당한 땅 위에 지은 적들의 도시.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실패한 연설이 적에게 남긴 울림은 작지 않았나 보다. 미국 14대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Franklin Pierce) 행정부는 세알트의 뜻과 연설을 기리기 위해 새로 세운 도시에 추장의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한다. 세알트라는 이름은 선주민 발음에서 미국식 발음으로 바뀌어 시애틀이 되었다.

실패의 연설과 백년의 이름09 ― 선주민의 토템폴은 여전히 여행자를 반긴다.
시대를 건너 남은 이름파이크 플레이스 시장 옆 작은 공원 한쪽에 선주민의 토템폴(Totem Pole)이 남아 있다. 토템폴 상당은 족장이 죽거나, 공을 세우거나, 새 족장이 탄생했을 때 자연의 생명과 신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우리는 누구나 꼭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세알트 추장에게는 그게 스콰미시족이었고, 바람과 대지와 생명이었으리라.
문헌이나 박물관이 아니고서야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는 적의 침범을 막지 못한 실패한 추장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도시의 기원이 되고, 150년을 건너는 정신의 토템폴이 되었다. 그가 지켜내고 싶었던 아름다운 자연과 생명 위에 터를 잡은 도시는 미국 안에서도 살기 좋은 도시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니 나는 다시 물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시애틀과 세알트, 그와 그의 정신은 정말 실패했는가.


글 양정훈(여행작가)•사진 양정훈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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