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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레이트 오션 로드(GREAT OCEAN ROAD)온 힘으로 ‘느리게’
달리는 지구의 길

온 힘으로 ‘느리게’<br>달리는 지구의 길
초원이 그려놓은 지평선 끝에 기암절벽이 걸리고, 그 너머에는 파도가 수놓은 수평선이 이어진다.
한정 없이 펼쳐진 250km의 바닷길, 이곳을 힘껏 달리다 보면 물을 수밖에 없다. 삶이란 실은 바람이고, 해변이고, 어스름한 새벽일까.
어느새 당신과 나는 아무것도 복잡할 것 없는 존재가 된다. 이 길은 그렇게 도시와 일상이 가려놓은 생의 단순함을 가르쳐준다.

온 힘으로 ‘느리게’<br>달리는 지구의 길01 ― 헬기 투어를 이용하면 바다 쪽에서 그레이트 오션 로드 해안 절벽을 탐험할 수 있다.
달리는 차창을 조금 내리자 물기 어린 아침 공기가 흠뻑 들어찬다. 낮지만 깊은 산과 끝을 모르는 평원의 길인가 하면, 이내 아찔한 절벽과 바다의 사잇길이다. 구불구불 호주 대륙과 남극해 틈에 신이 숨겨놓은 그레이트 오션 로드(Great Ocean Road)가 펼쳐져 있다. 중간중간 차려진 작은 마을마다 여행자와 서퍼들이 삶의 속도를 늦추고, 인간보다 훨씬 장엄한 것을 만난다.

온 힘으로 ‘느리게’<br>달리는 지구의 길02 ― 헬기에서 바라본 해안 절벽의 전경.
03 ― 땅 위의 코알라 웜뱃도 길 위에서 만날 수 있다.

위대한 것 사이를 지나는 길호주 멜버른(Melbourne)에서 남동부 해안선을 따라 4시간 남짓 운전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닷길’ 그레이트 오션 로드에 닿는다. 보통 질롱(Geelong) 해안, 시프렉(Shipwreck) 해안, 디스커버리(Discovery) 해안 구간으로 나뉘는데, 맘 먹고 밟으면 반나절이면 충분한 드라이빙 코스다. 하지만 누구도 이 길을 그런 속도로 달리진 않는다. 중간중간 맘에 드는 풍경을 만날 때마다 길을 멈추고, 오래 바닷바람에 젖는다. 작은 마을들에 여정을 풀고, 어촌 사람들의 삶을 구경한다. 늦잠을 자고, 느린 식사를 한다. 그러면 하루, 사흘, 일주일이 부족한 길이 바로 이곳이다.
마치 고생대 어디로 넘어온 것 같은 우림(雨林)이 해안과 해안 사이에 자리 잡고 수천, 수만 년 동안 파도가 조각해 세운 기암괴석이 지키는 길. 절벽 위 바위에는 온갖 착생식물(着生植物)이 바다를 향하고, 평원에는 양과 말, 소가 뒤섞여 놀고 있다. 바람은 느긋하고, 햇볕은 아련하다. 이 자연은 꾸밈이 없다. 감출 것도, 더할 것도 없다. 그러나 생생하고 날것인 힘으로 단숨에 사람을 압도해버린다.

온 힘으로 ‘느리게’<br>달리는 지구의 길04 ― 그레이트 오션 로드의 대표 명소 12사도상.
낯선 동물의 환영사바다와 절벽 곳곳에 마련된 전망대마다 산책로가 이어진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 중간중간 크고 작은 국립공원도 자리 잡고 있어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하이킹을 즐길 수 있다. 가파른 길은 많지 않다. 느리게 걸으며 흙과 바람의 냄새를 실컷 맡기 좋다. 론 해변(Lorne Beach)에서 내륙 쪽으로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나선 길. 바다를 벗어나 작은 숲이 시작될 무렵 길 위에서 깜짝 놀랄 녀석들을 만났다. 어라? 야생 에뮤(emu)다. 날개가 퇴화되어 날지 못하는 주금류(走禽類)의 한 종으로, 우리에게는 녀석들의 기름-에뮤 오일로 더 잘 알려진 호주 고유종이다. 커플인지 친구인지 두 녀석이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서는데도 눈 한번 끔뻑 안 하고 호기롭게 춤을 추며 지난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를 하이킹하면 누릴 수 있는 진짜 재미는 예고도 없고 계획도 없는 야생동물의 깜짝 등장에 있다. 흡사 다큐멘터리 채널이나 동물원에서나 봤을 법한 동물이 갑자기 길 이곳 저곳에서 튀어나온다. 에뮤와 헤어지고 채 한 시간이 되기도 전에 수풀 사이에서 또 한번 수상한 움직임을 눈치챈다. 다가서니 작은 회색 바위 하나가 꿈틀꿈틀. 헛! 이번에는 웜뱃(wombat)이다. 땅 위의 코알라로 불리는 녀석들. 이놈들은 에뮤와 정반대로 부끄러움이 많아서 가까이 다가가면 뒤뚱뒤뚱 도망치기 바쁘다. 그뿐 아니다. 워남불(Warrnambool) 마을에서는 흰 배 돌고래가, 오트웨이 국립공원(Great Otway National Park)에서는 코알라와 캥거루가, 엘리자베스 호수(Lake Elizabeth)에서는 오리너구리가 여행자를 위해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고 있다.

온 힘으로 ‘느리게’<br>달리는 지구의 길05 ― 수천, 수만 년 계속된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광막한 해안 절벽의 풍경.
아직 남아 신을 지키는 제자들지난 1만 년간 바람과 파도는 성스러운 열두 제자를 세상에 내기 위해 절벽에 끊임없이 균열을 만들고, 대지를 무너뜨려 기둥을 세웠을까. 예수의 제자는 원래 열둘이었으나 이제 그중 여덟이 남았다. 절벽 너머로 여덟 사도가 신의 의지를 지키며 바다에 맞서 싸우고 있다. 수십 미터 짙은 갈색 로브(robe)는 오랜 시간 바람에 쓸려 닳고 헤졌다. 그러나 저들의 분투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세상의 많은 여행자는 이 용맹을 대면하고 싶어 이곳을 찾는지도 모른다.
예수의 열두 제자를 닮았다 해서 이름 붙은 12사도상(Twelve Apostles). 그레이트 오션 로드의 대표 명소로, 오랜 시간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지형이다. 석회암 절벽 해안이 파도에 깎이고 깎여 이제는 대륙과 완전히 분리되어 거대한 절벽 기둥으로 남았다. 12개 바위가 있었지만, 4개 기둥은 파도에 무너져 내렸다. 높이는 무려 40m. 여전히 침식되며 매년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으니, 몇 세대가 더 지나면 이 사도들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온 힘으로 ‘느리게’<br>달리는 지구의 길06 ― 바닷길뿐 아니라 산과 들판을 지나며 다양한 동물을 만난다.
누구나 한 번쯤 서퍼가 되고 싶지아폴로 베이(Apollo Bay)에서 숙박을 하고, 늦은 아침 낚시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러 나선 길. 청년 둘이 제트스키와 서핑보드를 바다까지 옮기느라 모래사장에서 고생을 하고 있었다. 가볍게 인사하고, 잠시 그들을 돕는다. 이곳에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내륙 호주에 살고 있는데,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서핑을 하러 바다를 찾는다고. “당신도 서핑을 할 줄 알아요?” 그들이 묻는다. “맘만 있었지 해본 적은 없네요.” 대답하자 서핑만큼 중독적인 스포츠도 없다며, 서핑을 모르면 삶의 진정한 재미를 모르는 거라는 답이 돌아온다. “다음에 여기 올 때는 더 오래 머물며 서핑을 꼭 배워볼게요.” 함부로 약속했다. 그들은 만족한 듯 웃더니, 파도를 쫓아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는 남호주의 대표적인 서핑 파라다이스이기도 하다. 특히 벨스 비치(Bells Beach)나 아폴로 베이(Apollo Bay)가 유명한데, 연중 평균 높이 5~10m에 이르는 근사한 파도가 찾아 든다. 1990년대 초반 키아누 리브스와 패트릭 스웨이지가 주연한 영화 <폭풍 속으로>에서 전 세계 서퍼에게 숱한 영감을 준 장면 역시 영화 속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이곳 벨스 비치에서 촬영했다.
아폴로 베이에서 돌아 나오는데, 이번에는 해변 한구석에 꼬마 서퍼가 홀로 서서 한참 바다를 바라만 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파도가 무서운 걸까. 그는 부러운 눈으로 어른들의 서핑을 관찰하는 중이다. 녀석은 아직 확신이 없지만 머지 않아 틀림없이 저들보다 더 멋지게 파도를 타고, 바다를 탐험하게 될 것이라 나는 믿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어깨가, 보드를 꽉 쥔 그의 손이 모두 말해주고 있으니.

온 힘으로 ‘느리게’<br>달리는 지구의 길07 ― 그레이트 오션 로드는 남호주 서퍼들의 파라다이스다.
08 ― 아폴로 베이에서 만난 꼬마 서퍼.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힘껏’이 있을까그레이트 오션 로드의 느린 시간이 나흘을 넘어가고 있었다. 바람이 성기게 부는 모래사장. 피크닉을 나온 가족을 만났다. 한참 바라보다가 쭈뼛쭈뼛 다가가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었다. 여자는 5년 전 크로아티아에서 호주로 이민을 와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2명의 아이를 낳았다. “행복해 보여요.” 나는 짧은 만남의 인사를 그렇게 건넸다. 그녀의 도시락에는 바람을 타고 몇 개의 모래알이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찬 바람 때문에 아이가 품에 자꾸 안기는 탓에 사내는 팔이 저린 것도 같았다. 그래도 분명히 세상의 행복이 맨몸으로 저 풍경 속에 있겠다.
이 길을 달리는 동안 렌터카의 액셀을 밟으면 밟을수록 이상하게 삶의 속도는 점점 더 느리게 느껴졌다. 날카로운 절벽도, 있는 힘껏 들어차는 파도도, 고요한 하늘이나 초원까지 나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운 것이 바쁠 것 없이 저마다 호흡과 속도로 삶을 물들이고 있었다.
힘껏 살아간다는 의미는 바삐 달려나간다는 의미가 아닐지 몰라. 매번 최선을 다해 분주히 살겠다는 다짐도 아닐지 몰라. 때로 삶의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날을 보내는 가운데 뜨거운 바람이 식고, 낙엽이 지고, 첫눈이 오는 풍경을 눈치채는 것,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정말 힘껏 살아가는 것인지 몰라. 노을이 지고 있다. 천천히 물드는 바닷길을 걷는 발끝부터 금빛으로 젖기 시작했다.


글 양정훈(여행작가)•사진 양정훈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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