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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향해 질주하는 희망의 전사소설로 보고 영화로 읽는 ‘빠삐용’
소설로 보고 영화로 읽는 ‘빠삐용’

불법과 폭력이 들끓는 죽음의 수용소, 가슴에 나비문신을 해 ‘빠삐용(Papillon)’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프랑스인 ‘죄수’ 앙리 샤리에르는 희망의 화신이다. 밤낮도 없는 절대 어둠의 공간 속에서의 삶이란 살아있는 시체, 그러니까 영락없는 좀비의 삶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아홉 번의 탈옥 시도 끝에 빠삐용은 마침내 육신의 족쇄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된다.


소설로 보고 영화로 읽는 ‘빠삐용’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삶의 궁극적 의미를 묻다
샤리에르의 이 자전적 이야기는 1968년 ‘빠삐용’이라는 이름의 소설로 출간됐고, 1973년에는 프랭클린 샤프너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 속의 빠삐용 역을 맡은 스티브 맥퀸과 국채 위조범 드가 역의 더스틴 호프만이 보여준 강렬한 이미지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 이미 고전이 된 이 영화가 45년 만에 리메이크돼 주목받고 있다. 최근 국내 개봉된 ‘빠삐용’(감독 마이클 노어)에서는 영화 <킹 아서: 제왕의 검>의 찰리허냄이 ‘빠삐용’ 역을, <보헤미안 랩소디>로 퀸 열풍을 일으킨 라미 말렉이 ‘드가’ 역을 맡았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지만 한편으로는 배우의 예술이기도 하다. 맥퀸과 호프만, 허냄과 말렉. 이들의 연기는 비교를 해 볼 순 있지만 누가 더 뛰어난가를 묻는 것은 우문에 속한다. 각자 스타급 배우로서의 아우라를 내뿜으며 ‘인생 캐릭터’를 연기할 따름이다. 수십 년 전의 원작을 새로 만든 것인 만큼 이번 영화가 한결 현대적인 세련미가돋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원작이든 리메이크작이든 ‘빠삐용’의 흡인력은 단연 강력한 메시지에 있다. 희망, 자유, 용기, 우정, 신뢰, 연민, 복수, 용서, 화해, 행복 등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영화 전편에 녹아 있다. 이는 결국 희망과 자유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수렴된다. 빠삐용의 희망의 철학, 그리고 그 도저한 자유혼의 확인을 통해 우리는 삶의 궁극적 의미를 묻게 된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의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런 관점에서 보면 ‘빠삐용’은 단순히 스릴 넘치는 오락성 탈옥영화 혹은 감옥영화로만 소비될 게 아니다. 인간 존재의 근원을 묻는 심오한 철학영화 내지 [북앤무비] 작가주의 영화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


자유를 향한 끝없는 긍정, 희망은 힘이 세다
<빠삐용>이 희망의 서사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는 지금 살아있고 앞으로도 살아야만 한다. 반드시 살아야 한다. 언젠가 다시 자유를 되찾기 위해 살아야만 한다.…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기필코 자유로워질 것이다. 탈출하자, 탈출하자, 아니면 죽으리라. 결코 내 영혼도, 정신도 그 나락의 길에 붙잡아 둘 수 없다. 오로지 내 육체만이 잡혀 있을 뿐이다.”
언어에 아직 주술적 마력이 남아 있다고 믿는 것일까. 빠삐용, 아니 샤리에르는 절망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때마다 이런 다짐을 되풀이한다. 희망은 힘이 세다.
빠삐용은 최후의 탈출지로 바다에 상어 떼가 우글대는 위험한 ‘악마의 섬’ 디아블을 택한다. 이 섬의 북쪽 꼭대기에 ‘드레퓌스의 벤치’가 놓여 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쓴 프랑스 대위 드레퓌스가 사형 선고를 받은 뒤 홀로 앉아 새롭게 살아갈 희망과 용기를 다졌다는 곳이다. 드레퓌스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버린 프랑스를 그리워하며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이 상징적인 장소에서 빠삐용은 바다를 바라보며 자유를 꿈꾼다. 그리고 파도가 부서지는 순간 몸을 날린다. “이제껏 계획했던 다른 탈출들은 모두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고 지나치게 많이 준비했다. 결국은 제일 우스꽝스러운 시도가 성공을 하게 된 것이다. 코코넛자루 두 개로 바람과 바다를 가르면서…”
멀리 수평선 너머로 태양이 솟아오른다. 탈주의 꿈이 이루어진다. 빠삐용은 베네수엘라에서 ‘자유민’으로 정착한다. 육체의 감옥뿐 아니라 마음의 감옥에서도 벗어난다.
연민을 배우고 용서를 배우고 화해를 배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비로소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다.

배우 말렉은 <빠삐용>의 출연을 제안 받았을 때, 원작소설을 감명 깊게 읽은 터라 무척 설레였다고 밝혔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소설과 영화의 상호 영향관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설의 영화화는 오래된 문화적 관습이다. 모든 것이 섞이고 번지고 스며드는 하이브리드 시대, 소설과 영화의 경계는 무너졌다. 오늘날 상업영화의 반 이상이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 베스트셀러 소설은 80% 이상이 영화로 만들어진다.
장르소설의 거장 스티븐 킹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는 1976년 브라이언 드 팔머 감독의 <캐리>부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샤이닝>과 프랭크 대러본트 감독의 <그린 마일>, 2017년 개봉한 <다크 타워: 희망의 탑>과 <그것(It)>에 이르기까지 100편이 넘는다. <빠삐용>과 같은 부류의 영화인 <쇼생크 탈출>도 킹의 작품이다. 그의 소설은 <금연주식회사>나 <옥수수밭의 아이들> 같은 단편도 영화로 제작됐다.

문제는 걸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작품성과 대중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영문학 사상 최고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는 거장 스탠리 큐브릭과 애드리언 라인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지만 모두 원작의 예술성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평을 받았다. 때로는 원작 소설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영화에서는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밀란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한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영화 <프라하의 봄>이 그 한 예다. 원작의 서사적인 스토리만 추려낸 이 영화를 보고 쿤데라는 자신의 소설을 포르노로 만들었다며 분개했다고 한다.
앨프레드 히치콕처럼 영화의 매체적인 특성을 빈틈없이 파악하는 감독들은 통속 소설을 뛰어난 예술영화의 경지로 끌어올리기도 한다. 아카데미작품상을 받은 <레베카>가 대표적인 예다. ‘서스펜스의 여왕’ 대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은 감상적인 낭만미스터리라는 평을 받았지만, 영화는 히치콕의 손을 거치면서 원작의 느슨한 미스터리적 요소들이 긴박감 있게 살아나 호평을 받았다.


소설로 보고 영화로 읽는 ‘빠삐용’


빠삐용이라는 인물의 입체적인 이해
<영화의 이해>의 저자로 유명한 미국의 영화학자 루이스 자네티는 탁월한 소설일수록 영화화하기가 어렵다고 강조한다. 소설의 문학적 요소들을 영화라는 성격이 다른 매체로 번역하는데 따른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다. 소설 <빠삐용>은 베스트셀러에 올랐지만, 문학성이 도드라진 작품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원작 소설의 텍스트적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소설에는 여러 겹의 시선이 복합적으로 존재한다. 구체적인 세부 묘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상영시간의 제약이 있는 영화에서는 특정한 시각을 부각시키고 나머지는 축소하거나 배제하는 경우도 적지않다. 셰익스피어가 연극을 “무대 위에서의 두 시간 동안의 왕래”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영화 또한 제한적인 성격을 지닌다.
소설과 영화는 문법도 감각도 다르다. 많은 소설가가 할리우드에서 입신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좌절했다. 20세기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윌리엄 포크너는 할리우드에서 스트립트라이터로 일하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스티븐 킹 또한 자신의 소설을 각색·연출해 영화로 만들었으나 예술성과 상업성에서 모두 ‘실패’로 드러났다. 킹이 직접 감독으로 나선 영화 <맥시멈 오버드라이브>는 기계가 인간을 공격한다는 아이디어는 참신했지만 지루하고 평범하다는 평을 들어야 했다. 원작소설을 영화로 만들어 성공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러시아 혁명가인 블라디미르 레닌은 문학을 “가장 영특한 예술 장르”라고 했다. 폴란드 영화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는 “문학에 비하면 영화는 기술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는 영화를 폄훼하거나 장르 간의 우열을 가리기 위한 말이라기보다는 매체적 속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영화는 ‘선택과 집중의 예술’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원작 소설을 곁에 두고 영화를 보아야 할 필요성을 더해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빠삐용이라는 희대의 인물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런 수고스러운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야 빠삐용의 가슴속 깊이 숨어있는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의 전사’ 빠삐용, 다시 돌아온 그가 이 불온한 시대에 던져주는 전언은 어떤 것일까. 필경 이런 내용일 것이다.
욕망이 고갈된 삶은 비극이요, 죽음이다. 악무한(惡無限)의 지옥에도 희망은 있다. 먹구름 뒤쪽은 은빛으로 빛나는 법. 욕망하라 희망을 ….




Words 김종면(콘텐츠랩 씨큐브 수석연구원·전 서울신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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