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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이상주의자의 환상, 그 너머의 사랑위대한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
시간의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삶은 괴로울 수밖에 없다. 잊을 건 잊어야 한다. 그러나 강박에 가까울 만큼 과거의 시간에 매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미국 작가 프랜시스 스콧 키 피츠제럴드의 자전적 소설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의 주인공 제이 개츠비는 그런 ‘과거 집착형’ 인물의 전형이다.


지나간 사랑, 과거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비극
개츠비는 피츠제럴드의 또 다른 자아(Alter Ego)다. 그런 만큼 개츠비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작가의 개인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피츠제럴드는 지독한 가난 때문에 첫사랑인 지니브러 킹과 헤어졌다. 훗날 아내가 된 젤다 세이어로부터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한때 파혼을 당하기도 했다. 피츠제럴드가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한 달에 고작 90달러밖에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약혼을 깨버린 것이다. 그 같은 사랑의 곡절은 피츠제럴드에게 평생 치유할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개츠비의 불행은 과거에 대한 집착, 더 정확히는 지나간 시간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환상에서 비롯된다. 피츠제럴드는 지니브러 킹을 모델로 소설의 여주인공인 데이지 페이를 창조했다. 데이지는 옛 연인 개츠비를 버리고 속물근성으로 가득 찬 부호 톰 뷰캐넌과 결혼해 ‘데이지 뷰캐넌’이 된다. 하지만 개츠비는 ‘구원의 여인’ 데이지를 잊지 못한다. 개츠비가 주말마다 화려한 파티를 여는 것은 데이지가 한 번이라도 들러줄까 하는 바람 때문이다. 개츠비는 데이지의 마음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소설의 제사(題詞)에도 나와 있듯 황금 모자를 쓰고 하늘 높이 뛰어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개츠비의 비극은 거기에 있다.


물신주의의 한 복판에서 공감 가는 스토리
소설의 시대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부터 미국이 경제적 풍요를 구가한 1929년까지, 이른바 ‘재즈 시대(Jazz Age)’다.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고도 불리는 이때는 미국식 신여성(Flapper), 주류 밀매점(Speakeasy), 단발머리(Bobbed Hair) 등으로 표상되는 혼돈의 시대이자 예술의 시대였다. ‘재즈 시대의 대변자’인 피츠제럴드는 당시를 미국 역사에서 가장 화려하게 흥청거리던 시대로 묘사했다.

작가는 1920년대 미국 뉴욕 롱아일랜드를 배경으로 무너져가는 ‘아메리칸 드림’을 그린다. 정신적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의 ‘미국의 꿈’은 영국 식민주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점차 변질돼 갔다. ‘현실적 물질주의자’ 벤저민 프랭클린이 내세운 세속적 색채의 미국의 꿈 역시 빛을 잃어갔다.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개츠비도 ‘낭만적 이상주의자’로 포장됐지만 부를 일구기 위해 조직 폭력배와 손을 잡는다. 일찍이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갈파한 ‘비치 고디스(Bitch Goddess)’, 파멸이 뻔한 세속적 성공의 신화가 현실이 된 것이다.

소설 속 다양한 인물 군상이 보여주는 재즈 시대의 환락과 향락주의, 도덕적 타락은 어쩌면 지금, 여기에 훨씬 더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바벨탑공화국이라는 말이 시사하듯 우리는 물신주의의 한복판에 살고 있다. 1925년에 출간된 이 소설이 여전히 현재적 의미를 잃지 않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무엇이 개츠비를 위대하게 만드는가
영화의 원작으로서 ‘위대한 개츠비’는 어느 소설 못지않게 영화계에서 탐내는 작품이다. 1926년 허버트 브레넌 감독의 흑백 무성영화를 시작으로 ‘앨런 래드 버전’으로 불리는 1949년 작, 로버트 레드포드와 미아 패로가 주연한 잭 클레이튼 감독의1974년 작, 그리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캐리 멀리건이 각각 제이 개츠비와 데이지 뷰캐넌 역을 맡은 배즈 루어먼 감독의2013년 근작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영화화됐다.

1974년 제작된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 ‘논픽션 소설’의 대가 트루먼 커포티가 작품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를 남성 동성애자로 각색해 논란을 낳기도 했다. 결국 커포티는 해고됐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새로 각색해 마무리됐다. 이에 비하면 루어 먼 감독의 ‘위대한 개츠비’에는 문제적인 요소랄 게 거의 없다. 원작에 충실하다.

개츠비는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며 시간의 파괴적인 힘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치명적인 사랑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죽음을 맞는다. 개츠비의 장례식은 쓸쓸하기 그지 없다. 생전에 그의 은덕을 입은 이들조차 죽은 개츠비를 외면한다. 개츠비의 마음을 알아주는 ‘유일한’ 친구 닉 캐러웨이는 상념에 잠긴다. 개츠비에게 돈은 목적이 아니라 데이지의 사랑을 얻기 위한 도구였음을 확신한다. 욕망이 들끓는 비루한 세상에서 순정한 사랑을 꿈꾼 개츠비를 마침내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한다.

어쩌면 개츠비의 믿음대로 사랑은, 아니 사랑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가치인지 모른다.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 위태로운 환상이지만 그런 사랑의 경이마저 허용될 수 없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은 더 황막해지고 비극에 가까워질 것이다.



Words 김종면 콘텐츠랩 씨큐브 수석연구원, 전 서울신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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