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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안에 봉인된 또 다른 몸의 절규대니쉬 걸
대니쉬 걸

미국 작가 데이비드 에버쇼프의 소설 <대니쉬 걸(The Danish Girl)>은 1930년 세계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릴리 엘베라는 실존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덴마크 출신 화가인 그는 여자가 되기 전까지 에이나르 베게너라는 이름의 남자로 살았다. 그가 자기 안에 깃든 치명적인 여성성을 발견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에이나르는 행복했을까?
어느 날, 역시 화가인 아내 게르다(소설 속 이름은 그레타)의 그림 모델이 일이 생겨 대타로 나선 것이 ‘화근’이었다. <대니쉬 걸>은 2016년 개봉된 톰 후퍼 감독이 만든 같은 이름의 영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에이나르와 게르다 역을 맡은 에디 레드메인과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연기는 호평 이상이다. 무엇보다 에이나르의 흔들리는 자아 정체성은 레드메인의 양가적인 ‘미소연기’로 말미암아 한층 실감 있게 다가온다. 정체성 혼란의 와중에 흘러나오는 에이나르의 미소는 사실 통곡 같은 웃음이다. 벨기에 화가 제임스 엔소르의 그림 ‘슬퍼하는 남자’ 속 사내처럼 입으로는 웃고 있지만 눈으로는 울고 있는 그런 모양새다 .

에이나르에게 잠재된 여성성의 불길은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단순한 성도착적 행동을 넘어 목숨을 건 성전환수술, 아니 ‘성별적합수술’은 그의 생명마저 앗아갔다. 몸과 마음의 불일치에서 오는 ‘성별위화감(genderdysphoria)’을 해소하기 위해 택한 수술이 파국을 불러온 것이다.


대니쉬 걸


우리 사회가 인정하는성적 관용
동성애를 은밀한 코드로 다루는 장르를 종종 ‘벽장문학’이라고 부른다. 벽장 속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가꿔나가다가 마침내 울타리 밖으로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커밍아웃이다. 동성애 문화는 1970년대 이후 대중매체를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우리 일상 속으로 파고들어 이제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트랜스섹슈얼리즘(transsexualism)혹은 트랜스젠더(transgender)로 불리는 성전환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아직은 성적 소수자 중의 소수자로 머물러 있는 게 현실이다.

일본에서는 2003년 처음으로 트랜스젠더 정치인이 탄생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가미카와 아야라는 이름의 ‘그녀’는 자신이 ‘성 동일성 장애(gender identitydisorder)’를 앓고 있음을 당당히 밝히고 도쿄 세타가야 구의
구의원이 됐다. 우리 사회의 성적 관용은 어디까지인가. 남자 속에 여성이 있고 여자 속에 남성이 있다.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갖춘 양성도 있다. 성의 페르소나는 정말 다양하다. 주요 남성 작가들을 성적 측면에서 관찰한 버지니아 울프는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셰익스피어는 ‘양성’이고 셸리는 ‘무성’이다. 밀턴, 워즈워스, 톨스토이는 너무 남성성이 강한 반면 프루스트는 여성성이 너무 강하다.


대니쉬 걸, 운명과도 뗄 수 없는 여성성
<대니쉬 걸>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남자 여주인공(maleheroine)’ 에이나르는 그야말로 여성성의 화신이다. 물푸레나무 옷장의 문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여성 드레스가 입어보고 싶어 “피부 아래 살들이 무르익는 것 같은 느낌”에 빠져드는 인물이다. 이쯤 되면 그 전도된 성은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에게 맞지 않는 남자의 몸을 벗고 완전한 여성이 되고자 했던 비운의 덴마크 여인, 대니쉬 걸의 진정한 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메리카 원주민 중에는 남성임에도 여성 복장을 하고 여성처럼 행동하며 여성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과 처음 조우한 유럽인들은 이 여성 역할을 하는 남자들을 ‘버다치(berdache)’라고 불렀다. 아라비아어로 남성 매춘부라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이들이 종족 내에서 맡은 일과 종교적인 역할 때문에 그런 것으로 간주할 뿐, 이들을 성적 활동의 측면에서 다른 남성과 구별 짓지 않는다. 두 영혼을 지닌 사람들(two-spirit people)이며 제3의 젠더(third gender)라는 것이다.

대니쉬 걸의 성의 본질을 밝히기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의 영혼과 사회적 성까지 끌어들이는 것은 지나친 일인지 모른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생명 있는 모든 것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아는 자연의 형제다. 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인이다. 그들 중 누가 남성과 여성 두 개의 영혼을 지녔다고 해서 자연의 섭리를 배반했다고 할 수는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기 위해 제3의 젠더 역할을 수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니쉬 걸은 과연 제3의 성의 주체로 온전히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소설로도 영화로도 <대니쉬 걸>의 숨은 진실은 좀처럼 러나지 않는다. 다만 ‘운명적인 것’에 대한 생각의 깊이를 더 해줄 뿐이다.



Words 김종면 콘텐츠랩 씨큐브 수석연구원, 전 서울신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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