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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티콘 중독 시대
이모티콘 중독 시대

한 달에 2천 700만 명이 22억 건의 이모티콘을 사용한다. 2011년 11월 카카오톡 서비스가 처음 등장했을 당시 6개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2018년에는 6천 5백 여개로 증가했고 축약어와 함께 일상적인 대화가 되었다. 페이스북에서도 하루에만 50억 개의 이모티콘이 쓰인다.


다양한 감정 대리의 방법, 감정의 외주화?
문자보다 말이나 글보다 더 많이 쓰이는 이모티콘. 느낌표 대신 문자로 하는 말끝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을 위해 습관처럼 붙인다. ‘사랑해’ 대신 하트, ‘축하해’ 대신 박수나 꽃다발, 슬픔이나 위로 대신 눈물의 이모티콘. 이제는 이런 단순한 것 말고도 복합적인 감정까지 담아낸 새로운 것들까지 쏟아지고 있어 고민 없이 ‘나의 감정’의 한 조각으로 수북이 모아놓는 게 취미인 사람들도 많다.

이모티콘이 감정의 ‘기호’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저서 <트렌드 코리아 2019>에서 이렇게 감정을 대리해 주는 사람이나 상품, 서비스를 ‘감정 대리인’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모티콘도 당연히 거기에 속한다. 디지털시대, 스마트폰 하나면 ‘나’의 모든 것을 담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세상에 아날로그 식으로 감정을 되살려 구구절절하게 표현할 필요가 없다. 축약어, 그리고 다양한 기호와 상징들이 즐비하다. 이모티콘 하나 ‘툭’ 보내면 끝난다.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어디 이모티콘 뿐이랴. <나혼자 산다> <전지적 참견시점> <미운 우리 새끼>같은 관찰형 예능프로그램에서의 패널도, ‘대신 욕해주는’, ‘대신 화내주는’ 페이스북 페이지도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통해 나의 감정을 대리 발산 해주는 대리인들이다. 자신은 살 수 없는 명품들을 쓸어 담아 개봉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마치 구매한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하울(haul) 영상, 날마다 퇴사를 꿈꾸는 직장인들의 감정을 읽어주고 공감하는 퇴사방송도 감정 대리인 역할을 해준다.

김난도 교수(서울대)는 이런 현상이 다른 분야로 점차 확대되면서 ‘감정의 외주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자신의 감정을 다른 대상에 투영하고 대리 전달한다는 뜻이다. 예측이 아니고 이미 현실이다. 실제로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소비자의 취향과 기분에 맞춰 상품을 추천 서비스하는 감성큐레이터, 전문가가 나와서 대화를 나눈 후 감정과 상황에 맞춘 컨설팅을 해주는 ‘감정 관리인’까지 등장했다.

한국만이 아니다. 해외에도 감정 대리인이 많다. 2016년 영국의 한 번역회사는 ‘이모티콘 번역가’를 구한다는 광고까지 냈다. 그의 역할은 나라, 문화, 연령, 세대별로 이모티콘이 어떻게 해석되고 사용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감정 교육 게임인 페피팔(Peppy pal)같은 데서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이모티콘이 갖는 미묘한 감정의 차이를 분석한다. 일본에서는 간단한 대화로 운전자의 기분 상태와 졸음 여부를 파악해 그것을 풀어주는 소형 인공지능로봇이 등장해 인기다.


인간의 향기를 잃어가는 감정의 동물 ‘인간’
디지털 콘텐츠를 통한 대리경험을 넘어 감정까지 대리하는 시대. 왜 이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을까. 경제적인 것에서 이유를 찾는 사람들도 있다. 경험을 바탕으로 하기에 감정에도 시간과 돈이 든다. 바쁜 현대사회에서, 그리고 경제적 여유가 없는데도 굳이 원하는 감정을 느끼기 위해 많은 비용을 쓸 필요가 없다. 대신 얼마든지 경험을 대신할 수 있는 콘텐츠들을 편리하고 다양하게 구할 수 있다. 가성비가 높아 이 역시 ‘소확행’의 하나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이유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어렵고 불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과 얼굴 맞대고, 아니면 직접 대화하는 것을 회피한다. 책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번거롭고 싫다. 하물며 자신의 감정을 정확한 언어로 설명하기란 자신 없다. 특히 디지털화, 개인화가 심한 밀레니엄 세대들은 말 한마디 없이 이모티콘만으로도 충분히 감정을 대신하고 서로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감정 대리인은 일종의 아바타이다. 자신과 닮았지만 자신의 표정이나 심리, 감정까지 노출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니 적당히 언제든, 누구에게나 쉽게, 나의 대리인으로 보내면 그만이다. 디지털 공간에서 이루지고 있는 인간관계와 다를 바 없다. 감정 역시 직접 만나는 것을 피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뒤집으면 감정까지도 누군가 만들어 놓은 세상 속에서 선택하고, 그 속에 남의 감정을 맞춘다는 것이다. 지식, 기억에 이어 감정까지 내 안에 두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살면서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직접 나의 감정을 보여주어야 하고, 상대의 감정을 직접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다. 그것을 자신만의 사유와 언어로 섬세하게 포착하고 드러낼 때, 자신이 원하는 감정의 상태를 만드는 힘이 생기고, 원하지 않는 감정을 다스리고 조절하는 면역력이 생기고,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채울 수 있게 된다. 누구나 이모티콘을 보내고 받아보면서 한 번쯤은 자문해 봤을 것이다.

‘이것이 정말 나의 감정인가’ ‘온기 없는 겉치레, 누군가의 흉내를 내는 것은 아닌가’하고. 당연하다. 거기엔 인간의 손길이 보이지 않으니까. 대리인은 내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나처럼 해준다. 그런 로봇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고 그 로봇에게 나의 감정까지 맡기면 왜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고 했을까. 감정이 서로 만나고 부딪치면서 관계를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인간의 향기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Words 이대현
이모티콘 중독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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