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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K 사거리에서 역사를 보다
IBK 사거리에서 역사를 보다

수많은 사람과 자동차가 붐비는 IBK 사거리는 서울의 4대문 안처럼 화려한 궁궐이나 점점이 이어지는 처마 끝 아름다운 기와집 행렬은 없는 곳이다. 그러나 조각조각 이어지는 역사적 사건들과 그 무대에서 종횡무진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IBK 매거진에서는 총 4회에 거쳐 IBK 사거리를 중심으로 한 역사의 흔적을 소개할 예정이다.


을지로의 유래와 삼일로
IBK기업은행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연결된 길이 삼일대로이고 동서로 가로지르는 길이 을지로이다. 을지로는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IBK 사거리에서 근접한 수표교 일대에는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기세를 제압하고자 중국 수나라를 무찌른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따서 을지로라 한 것이다. 해방 이후인 1946년 10월 1일 당시 서울시장인 김형민이 역사학자와 문교부장관 등과 함께 일제 강점기에 지어졌던 가로명(街路名)을 개정했다. 그 지역에 어울리는 역사적 위인의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성군 세종대왕의 이름을 따서 ‘광화문통’을 ‘세종로’로, 일본인이 가장 무서워하는 이순신의 시호로 그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본정(혼마치)’을 ‘충무로’로 바꾸었다.

그럼 이곳 을지로를 일제 강점기에는 무엇이라 불렀을까? ‘황금정(고가네 마치)’이라 했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큰 고개가 있었는데 땅이 질고 붉어 마치 구리가 햇빛에 반사되는 것 같다고 구리개라고 했다. 갑오개혁 이후에는 구리동(銅) 자를 써서 동현(銅峴)이라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제 강점기에는 그 거리를 황금 색깔이 띄는 곳이라 하여 일본식 동명, 황금정으로 바꾼 것이다. 흙이 구리가 되고, 구리가 황금이 된 것이니 이름만 보면 이 동네는 남아도 한참 남는 동네라 할 수 있겠다. 지금도 이곳은 현대판 황금인 돈을 주무르는 금융기관들이 포진해 있다. IBK기업은행을 필두로 대한민국의 월스트리트라 할 만한 곳이다. 그렇다면 삼일대로의 이름은 어떻게 붙여진 것일까?

대로를 따라 쭉 북으로 올라가면 그 이유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거기에는 기미년 3.1만세운동의 불을 지핀 탑골공원이 있다. 이곳에서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IBK 사거리에서 남으로 내려가면 일제 강점기에 조선을 지배한 조선총독부가 남산에 자리하고 있었다. 을지로와 삼일대로가 만나는 곳이 IBK 사거리다. 참 의미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무슨 일들이 일어난 것일까?


청계천 장통교에서 파생된 이름 ‘장교빌딩’
장교빌딩 인근에 청계천의 다리 중 하나인 장통교가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장통방이라 불렀는데, 장교빌딩은 여기서 파생된 이름이다. 그런데 골목들이 이상하다. 도심의 한가운데라면 길들이 큼직하고 반듯하게 뚫려있을 법한데 IBK기업은행 뒤의 길들은 구불구불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하천과 관계가 있다. 이곳은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비스듬하게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지형이 삼각형처럼 되었다. 그래서 IBK기업은행 뒷동네를 삼각동이라고 부른다. 그 하천을 복개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삼각동 아래에는 수하동이다. 수하동은 물 수(水) 아래 하(下)자를 써서 청계천 아랫동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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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의 병을 치료해 주던 ‘혜민서 터’가 있다고?
IBK 사거리의 건너편 을지로3가역 1번 출구 앞에는 혜민서 표석이 있다. 혜민서는 지금으로 치면 국립의료원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가난한 백성에게 약을 지어주고 의술로 병을 치료해주는 한편 의녀들을 교육하는 기관이다. 이곳 주변에는 약을 조제하는 약방이 많았다고 한다. 지방에서 올라온 약재상들이 이곳에서 약을 유통하였고 그 중심에 백성의 병을 치료해주는 혜민서가 있었다. 머릿속에 그림을 하나그려볼까? 아마 조선 최고의 의원인 허준과 말로만 듣던 장금이가 이곳 IBK 사거리에서 백성을 치료하고자 분주히 다니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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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이 만든 ‘조선광문회’의 흔적
최남선이 만든 국학연구기관. ‘조선광문회’의 흔적 복개된 길을 따라 청계천에 이르는 길 끝, 장통교 앞에 ‘조선광문회 터’라는 표석이 있다. 조선광문회는 나라를 빼앗긴 직후인 1910년 10월 10일, 조선의 3대 천재(이광수, 홍명희, 최남선) 중 하나인 최남선이 문을 연 연구기관이다. 일제는 한국 문화의 기반이 되는 국문 연구와 한국어, 한국사를 폐지하고 교육을 못하게 하였다. 이에 격분한 최남선은 박은식, 도산 안창호, 주시경, 장지연, 이승훈 등과 함께 조선 고전과 국학 관련 책들을 간행하게 되었다. 바로 조선광문회였다. 이곳에서 3일 동안 머무르며 최남선은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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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나하나 짚어보니, 일제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역사를 기억할만한 건물들이 파괴되어 터 위에 표석만 남아 있는 것이 아쉽다. 볼 수는 없어도 IBK 사거리 주변은 적지 않은 역사의 조각이 아직도 현재의 공간에 둥둥 떠다니는 듯하다.

*‘IBK 사거리-전차는 달린다! 경성의 월스트리트속으로’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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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 한선생 Photographs. 고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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