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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K 사거리를 무대로 활약한 조선시대 사람들
IBK 사거리를 무대로 활약한 조선시대 사람들약의 처방이 기록된 고서
현재는 흘러간 시간의 축적 위에 존재한다. 지금 을지로 입구와 IBK기업은행 주변의 모습이 과거에도 지금처럼 화려한 동네였을까? 남산이 있어 풍광이 수려한 이 동네의 모습은 박지원의 <허생전>에 잘 나타나 있다. 허생은 남산 아래 묵적동의 오막살이집에 살았다. 그는 집안일에는 관심 없고, 책 읽는 것만 좋아하는 백면서생인지라 아내가 겨우 삯바느질로 살림을 꾸려갔다. 아내의 잔소리에 허생은 집을 나와 한양 제일 부자 변 씨를 찾아가 만 냥을 빌린다. 안성과 제주에서 과일과 말총을 팔아 큰돈을 벌었다. 글 읽는 서생이지만 뜻을 품고 장사를 하니 돈을 모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IBK 사거리 주변에는 허생의 후예라 할 금융 기관들이 막대한 자본을 주무르며 포진해있다. 이곳에는 그런 사람들만 있었을까?


허준과 장금이를 만나는 ‘혜민서’
갑신정변 당시 수구파 민영익이 개화파의 칼에 찔려 죽어가던 것을 의료 선교사 알렌이 본인의 집에 데려가 치료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안국동, 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인 개화파 홍영식의 집터에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濟衆院, 백성을 구하는 집)이 문을 열었다. 그 후 제중원은 자리를 한차례 옮겨 1886년 11월 IBK 사거리로 이전한다. 이곳에서 1904년 남대문으로 이사하기까지 수많은 병자를 치료하였는데 왜 제중원은 이곳으로 옮겨 간 것일까? IBK 사거리는 조선 초기부터 많은 약재상과 약방들이 있던 곳이다. 전국에서 모인 한약 재료와 중국에서 들여온 진귀한 약재가 이곳 약방에서 거래되었다. 지방에서 약초를 팔기위해 올라온 장사꾼들과 약을 지으려는 사람들, 궁궐에서 필요한 약재를 구입하기 위한 의관들이 줄을 이었다. 골목 여기저기, 약방 이곳저곳에서 값비싼 의약 재료들이 ‘한약냄새’를 풍겼던 곳이니 이곳에 오기만 해도 웬만한 병이 낫지 않았을까? 그러니 제중원이 약방의 메카인 이곳으로 온 것은 당연하다.

이곳에는 약방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혜민서라고 하는 의료기관이 있었다. IBK기업은행 맞은편에는 혜민서가 있던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혜민서는 서민들에게 약을 나누어 주고, 의료 전문인을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IBK 사거리를 무대로 활약한 조선시대 사람들(좌) 약초를 파는 노인들, (우) 제중원

남녀가 유별한 조선 사회에서 남자만으로는 여성을 진찰하기가 쉽지 않아서 성종 때에는 전국에서 70명의 동녀와 관기를 뽑아 의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들을 천시해서 부르는 말이 ‘약방기생’이다. 장금이가 현존 인물이라면 그녀도 이곳에서 근무하지 않았을까? 장금이는 이곳에서 한약 냄새 폴폴 나는 약탕기를 들고 <동의보감>을 쓴 허준을 따라 다녔을 것이다. 세상을 놀라게 한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 외할아버지인 월북 작가 박태원의 집안도 이 근처에서 ‘공애당 약방’을 운영한 것을 보면 이곳의 내력이 더 정확해진다.


숙종과 장희빈을 잇는 다리 ‘수표교’
김지미, 남정임, 윤여정, 이미숙, 전인화, 정선경, 김혜수, 이소연, 김태희 이들 여배우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들은 모두 극중에서 장희빈 역을 한 배우라는 것이다. ‘장희빈’을 소화 하려면 인물은 물론이고 착한 인현왕후를 궁지에 몰아넣는 악녀 역할도 잘 해야 한다. 그런데 그 바람기 많은 숙종(조선 21대 왕)이 역관의 딸에 불과한 장옥정(훗날의 장희빈)을 만난 곳이 IBK 사거리 뒤편의 청계천을 건너는 다리인 수표교다.

역대 임금들은 지금의 영락교회 자리에 있던 영희전(왕의 어진을 모셨던 곳)에 수시로 거둥(왕의 행차를 이르는 말)하여 제사를 드리곤 했다.

옥정이 수표교 다리를 거닐 때 이를 본 숙종이 한눈에 반하여 그녀를 궁으로 부른 것이다. 숙종은 장옥정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고 결국 그녀는 피비린내 나는 사화의 주인공이 된다. 그래서 아직도 이 지역에는 미녀가 많은가? IBK 사거리를 걷다 보면 아직도 얼굴뿐 아니라 맘까지도 예쁜 장옥정의 후예들을 만날 수 있다.


IBK 사거리를 무대로 활약한 조선시대 사람들(좌) 수표교, (우) 기해기사계첩에 그려진 장악원의 모습

흥청이 망청이 되었던 ‘장악원’
을지로입구, 현재 명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음악을 가르쳐 악공(樂工)을 길러 내는 장악원(掌樂院) 관아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한때 이곳을 장악원동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장악원은 궁중의식에서 꼭 필요한 음악을 담당하였다. 장악원 소속 악공들은 각종 제례의식과 왕의 조회의식, 그리고 궁중 잔치인 연향(宴享), 외국사신을 접견하는 의식에 동원되었다. 이곳의 악생들이 한때는 971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조선에서 얼마나 예와 악을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연산군 때는 국가 의식보다는 왕의 향락을 위한 기관으로 전락해서 전국의 재색을 겸비한 기녀들을 뽑고 그녀들에게 기예를 가르쳤다. 그리고 등급을 매겨 흥청, 가흥청, 계평, 운평 등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반정이 일어나 잘 나가던 흥청(興淸)이 없어지면서 망청(亡淸)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규모 없이 흥에 겨워 즐기는 모양을 ‘흥청망청 한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 잘나가던 장악원 악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라가 일본에 빼앗기자 일부는 서양식 극단 원각사에 소속이 되기도 하고 일부는 서양식 밴드에 편입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모든 게 불과 100여 년 전에 IBK 사거리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 다음 호에는 ‘금융 기관의 집약처, IBK사거리의 현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Words. 한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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